◘ 이충석 목사님의 인생 새옹지마(塞翁之馬)를 들려주십시오
서울신학교에 입학한지 33년, 낙도오지사역 28년째인 중년목사의 삶속에 담긴 새옹지마를 모두 떠올리기엔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특히 몇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서울신학교 학우회 회장이 됐습니다. 그때 제 인생을 좌우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학내문제로 소속 노회에서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입학 거부라는 제재를 받아 좌절을 했던 일이 저의 목회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그 후에도 노회의 제재는 계속됐고,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무려 8년 동안 공부했지만 결국 우리 교단을 떠나 다른 교단에서 안수를 받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28년 전 그 좌절 중에서 낙도오지 강원도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2004년 목사가 되어 강원도 정선 동강 산골에다 2006년 동강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힘겨운 선교이다 보니 가족들과 헤어져 이 마을과 저 마을에서 동가숙 서가식하며 오지마을을 다니며 선교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터전을 잡고 교회를 담임한지 15년째, 무조건 견디며 예배자리, 기도자리 그리고 전도자리를 지켰습니다. 지금은 지역사회로부터 무한 신뢰 속에서 동강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동강교회는 귀농귀촌 성도들이 늘고 있다. 매주 토요일마다 서울에서 강사가 내려와 우쿨렐라를 가르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발생 초기에는 치명적 어려움을 안겨주어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지친 도시 교인들이 한 두 가정 귀촌하는 현상이 생기면서 내년에 4가정이 귀촌을 결심하고 이사 올 예정입니다. 28년 버티고 전도에 인생을 걸어온 사역에 찾아든 재앙은 이제 새옹지마가 되어 귀농귀촌 사역에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목회비전이 생겼습니다. 새옹지마가 분명합니다.
현재는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강교회 첫번째 예배당
◘ 목사님의 약력과 이력을 말씀해 주세요. 목양 30년과 55년 인생을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저는(동강교회 이충석 목사) 1965년생 만5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입니다. 1989년 당시 승동교회에 있던 서울신학교를 입학해서 봉천동으로 학사를 옮길 당시 학우회 회장이었습니다. 1993년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을 진학 했으나 학우회 회장 시절, 학내문제에 앞장서서 노회로부터 제재를 받아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신학교 재학 중에 총신낙도선교회에서 제게 파송장을 주었습니다. 그 파송장을 들고 강원도 정탐 사역 및 순회사역자로 전도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강원도 정선에서 동강교회를 개척하고 지금까지 사역하고 있습니다.
정선에서 사역하던 중 무려 8년 동안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노회의 계속된 제재로 별 수 없이, 2004년 다른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다시 우리 교단 평안노회로 들어왔습니다. 2019년 총신편목과정을 이수하고 평안노회 정회원이 되었습니다. 2020년 5월 귀농귀촌하신 두 분을 장로로 세우고 저도 동강교회 위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저의 사역은 1990년 수도노회 동성교회 전도사를 시작으로, 함동노회 성복교회 교역자로 섬겼습니다. 1991년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그동안 제게 총신낙도선교회 간사, 오지순회사역자, AMW 선교회 이사, 다문화선교협의회 이사, 동강산들 협동조합 대표 그리고 영광스러운 동강교회 위임목사입니다. 저서로는 "전도에 인생을 걸라"가 있습니다.
저는 불신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친을 병으로 잃었습니다. 32살의 젊은 과부의 장남으로 유년기를 친척집으로 떠돌아 더부살이를 했던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났습니다. 친구가 좋아서 그가 다니는 교회(그 친구의 아버님이 목회하시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극심한 반항심으로 방황을 거듭하다가 벼랑 끝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 회심을 했습니다.
회심 이후 편모의 장남이 가난한 가정의 생계를 돌보지 않고 신학교 입학을 결심한 것은 어머님의 심한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결국 야간에는 공부하고 낮에는 돈을 벌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 재학 중 결혼을 하고서는 기약도 없이 떠났던 강원도 오지에 발목이 붙잡혀 아직도 못 떠나고 있습니다.
27살에 결혼해 이듬해 강원도로 와서 서울에 남겨둔 어린 아내는 (당시 아내는 26살) 두 아이를 키우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농촌교회 목사를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지난 28년 간 제 아내와 두 아이와는 거의 떨어져 살았습니다. 이젠 아내와 함께 목회하고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래서 경제적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우리 부부는 함께 남은 삶을 강원도 정선 동강교회 목회로 삶을 보내고자 합니다.
지난 28년 동안, 15년은 떠돌이 배낭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그때 마을의 머슴처럼 동가숙 서가식을 거듭하면서 깊은 산골 소규모 부락들을 순회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006년 모교회인 동성교회와 서대문교회(장봉생 목사)의 도움으로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에 700평의 땅과 농가주택을 구입하였습니다. 2007년 1월 14일. 고추 건초창으로 쓰던 비닐하우스에서 놀랍게도 개척멤버 27명으로 동강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인들의 평균 연령이 70대로, 농사가 주업인 가난한 농민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동강교회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제안으로 당시에는 생소한 ‘블루베리’를 들여왔습니다. 7가구의 작목반을 만들어 조합을 형성해 자립을 꿈꾸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녹녹한 작물이 아닌지라 험난한 과정을 겪으며 10년째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6년 분당의 어느 교회가 뜻밖에 헌금한 건축헌금으로 지금의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그 예배당이 현재 귀농귀촌 사역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저의 목회는 조금은 특별한 과정을 겪으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현재 ‘코로나19’가 위기가 아닌 새로운 기회라고 여기고 준비해 온 교회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성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