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동, 증산동, 신길동, 신림동, 신길동 그리고 다시 신림동. 1992년 5월 23일 결혼해서 30년 동안 살았던 동네들이다. 증산동을 제외하면 모두 ‘신’이 들어가는 동네에서 살았다.
신림동에서 신길동으로 이사할 때이다. 우리 가족은 교회를 다니기에 일요일(주일)을 피해 주로 토요일에 이사한다. 소위 ‘손 있는 날’도 개의치 않기에 이사날짜는 쉽게 정할 수 있었다. ‘손 없는 날’은 이사비용도 더 비싸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신길동 반지하 단칸방을 그 집 아저씨와 한 달 뒤 토요일에 이사하기로 계약했다. 한 달 뒤 토요일이다. 신림동에서 이삿짐을 꾸리고 신길동 좁은 골목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 집으로 들어가 보니 방에 부부가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전혀 이사 갈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이삿짐도 하나도 꾸리지 않았다.
황당해서 물었더니. 나와 계약한 아저씨는 꿀 먹은 벙어리로 앉아 있었다. 그 집 실세인 아주머니가 기세등등해서는, 우리는 내일(일요일)에 이사하겠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동산 중개인들이 나서서 계약대로 이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도 기세등등한 이 아주머니는 귀를 막고서는 막무가내로 버텼다.
갑자기 좁은 골목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좁은 골목에 이삿짐 트럭 두 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다 두 명의 부동산 중개인, 5명의 이삿짐센터 일꾼들, 우리 네 식구와 이삿짐 옮긴다고 찾아온 아들 친구들 2명이 골목을 가득 메웠다. 실랑이가 길어지자 구경나온 이웃들로 좁은 골목이 가득 찼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답을 찾아야했다. 이사가 하루 지연되면, 나만 손해가 아닌가. 먼저 부동산 중개인에게 “저 부부의 중개료를 포기하면 안 되겠냐?”고 제안했다. “절대 그럴 수 없다면서 계약대로 해야 된다”는 대답했다. 하기야 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정당하게 계약하고 그 수수료를 받겠다는데. 그리고 계약을 이행하라는 것인데.
나는 다시 기세등등한 아주머니와 마주 앉았다. 우리는 내일, 일요일에 교회에 가야하니 오늘은 이사를 마쳐야 한다며 설명했다. 그럼에도 기센 아주머니는 막무가내였다. 대화가 길어지자, 앞집에 사시는 머리카락이 허여시고 인자하신 노부인께서 나와서, 자신의 집 주차장에 이삿짐을 내려놓고 내일 이사하라고 제안하셨다. 좋은 이웃이 있어서 참 고마웠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두 번 이사하는 것이 되어서 비용도 두 배가 들어야 한다.
역시 제일 간단한 방법은 기세등등한 아주머니를 설득하는 방법뿐이었다. 이미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부동산 중개인 그리고 우리 식구들과 이웃들이 계약대로 하지 않은 두 부부를 바라보면서, “머. 이런 경우 없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냐?”며 불평하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제로 이삿짐을 끌어낼 수도 없었다.
다시 기세등등한 아주머니와 마주 앉았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기를 “부동산 중개 수수료를 내지 않겠다”며 우겼다. 그 말을 들은 부동산 중개인들은,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지 말라”며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흥분했다. 그러나 나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라고 배웠기에 계속 아주머니와 대화를 이어갔다.
“아주머니! 부동산 중계 수수료를 안 낼 수는 없습니다. 부동산 중개인들도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 중계수수료는 저와 아주머니가 반반씩 지불하죠. 그렇다면 아주머니가 부담하는 그 반의 수수료 중에서 그 절반을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죠?”
아주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나의 제안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부부는 그렇게 급하게 이삿짐을 꾸리고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이사를 떠났다. 우리는 그 사이에 자장면과 짬뽕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렇게 기세등등한 아주머니와 집안에서 살림하는 힘없는 아저씨가 이사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신길동 좁은 골목에 평화가 찾아왔다. 벌써 10년도 더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