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하늘양식교회 송삼용 목사는 “윌버포스와 합동포럼의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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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양식교회 송삼용 목사는 “윌버포스와 합동포럼의 비전”

기사입력 2022.08.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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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포럼(대표회장 김종혁 목사) 3차 포럼이 합동포럼의 비전과 나아갈 길이란 주제로 816일 오전 1030분 대전 인터시티호텔 개최되어 총회를 변화시키는 자가 아니라 내 자신이 먼저 변화되기를 갈망했다.

 

하늘양식교회 송삼용 목사는 윌버포스와 합동포럼의 비전을 강의했다. 송 목사는 목회자의 목회지는 교회뿐만 아니라 총회라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4가지를 제안했다. 윌버포스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40년 간 시도한 개혁운동은 합동포럼이 깊이 교훈 삼아 총회개혁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 총회를 섬기기 위해 나선 일꾼들을 뒷바라지 하되, 물질, 미래전략, 개혁정책 등을 위해 멀티후원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총회 개혁과 변화를 위해 하루 한끼 릴레이 금식기도를 제안한다. 기드온 300용사처럼 <300인 동지>를 결성하여 개혁신학을 바탕으로 한 동지들이 총회 살리기 운동을 펼쳐 나가자고 제안했다. 다음은 강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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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삼용 목사 / 하늘양식교회

광신대 겸임교수, 칼빈대 대우교수, 고려대학교 법학박사 과정

교회법신문·크리스천포커스·CFC대표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선물이 바로 자유와 평화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와 평화는 신적 근원을 둔 소중한 가치며,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바탕으로 세워진 인간의 존엄성은 신불신을 막론하고 공동체가 실현해야 할 정의의 가치 기준이다. 이것은 창조질서요 하나님의 섭리다.

 

그런데 에덴에서 세상과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와 평화가 깨졌다. 그 결과 전쟁과 착취, 억압 등이 역사를 지배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사람을 노예로 삼고, 물건 취급을 할만큼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고, 자유와 평화도 사라졌다. 예컨대, 노예제도가 17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영국에서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깨닫고 폐지운동에 나선 이가 윌리암 윌버포스였다.

 

윌버포스가 40년간 싸워 일궈낸 것이 노예제도 폐지였고, 그 영향으로 프랑스혁명, 미국남북전쟁 등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지유를 되찾았다. 결국 윌버포스가 40년간 싸워서 일궈낸 노예제도 폐지에 의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다.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고, 인간의 존엄성이 회복되었다. 오늘 특강 주제는 윌버포스와 합동포럼의 비전이다. 먼저 윌버포스의 40년 동안 싸우면서 일궈낸 역사적인 개혁 운동의 배경과 그 성공 요인 등을 살펴보고, 합동포럼의 비전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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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18세기 영국 사회상

 

17세기 영국은 청교도 혁명으로 한때 종교의 부흥을 이루었다. 18세기 중반부터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가 성장하여 부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주변 나라의 경쟁을 이겨내고 세계 각곳에 진출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세계 최대의 무역 국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영국의 사회 현실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일부 부유층이 대지주가 되어 부를 독차지하고, 농민들은 땅을 잃게 되어 빈민으로 전락했다. 공업이 발달하면서 기술자들이 노동자가 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다.

 

사회 풍토 역시 향락주의가 성행했다. 부유층은 향락을 즐기면서 술과 도박을 일삼았고, 빈곤층에서는 꿈을 잃어버린 채 술과 도박에 빠진 경우가 흔했다. 거기에다 성직자들은 지적 우월주의에 빠져서 하류층에는 무관심했다. 이같은 사회적 현상을 가리켜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은 종교가 없는 나라인 것 같다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만인이라는 말들이 나돌기도 했다.

 

2. 윌버포스의 출현

 

윌리엄 윌버포스는 1759년 영국 요크셔의 킹스톤 어폰 헐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헐 시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부유층이었다. 부친 역시 부유한 상인이었다. 윌버포스는 어린 시절(9) 때 부친을 여의었지만 부를 상속하게 되어 부유층의 특권을 누렸다. 윌버포스 역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한때 술과 도박 등의 유흥을 즐겼다. 그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복음적 신앙을 이어받았으나 형식적인 신앙을 가졌을 뿐 세상의 유혹을 이겨 내지 못했다.

 

1776년에는 캠브리지대학교 세인트존스 대학에 입학하여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영국 역사상 최연소 수상이 되었던 윌리엄 피트와 함께 대학시절을 보내며 우정을 나누는 특권을 누렸다. 그런 영향 때문이었던지 윌버포스는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그의 꿈대로 21세의 나이로 킹스턴 어폰 헐의 하원 의원이 되었다. 선거운동에서는 천부적인 웅변 실력을 맘껏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당선은 부를 기반으로 한 매표 행위가 개입되었으며, 당선 후에도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흥청대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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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회심 후 국회 진입과 새비전 자네의 목회지는 국회일세

 

그러던 중 자신의 친한 선배였던 아이작 밀너와 유럽 대륙을 여행을 떠난 것이 그의 일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여행 중에 밀러와 종교에 관해 토론을 하다가 신앙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후 회심을 경험했다. 특히 윌버포스는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의 명저 [영혼에 있어서 종교의 성장과 진보]를 읽고 자신의 타락한 생활을 회개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29살에 회심한 윌버포스는 그 동안 흥청거리며 살았던 쾌락 중심의 삶을 청산했다. 술과 도박을 끊었고, 대신 매일 말씀을 읽은 후 묵상하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조부와 부친에게 배웠던 복음적 신앙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 아예 정치를 포기하고 성직자의 길로 가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미 정치가요 수상이 되었던 친구 피트는 윌버포스에게 성직자의 길을 적극 만류했다. 피트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꼭 성직자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조언했다. 용기를 내어 정치에 힘을 쏟아부었지만 또 다시 한계를 느낀 윌버포스는 이번에는 친구 존 뉴톤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성직의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뉴톤 역시 타고난 정치가의 재질과 기량을 언급하면서 자네의 목회지는 국회일세라고 조언했다.

 

4. 사회 개혁에 대한 불타는 사명

 

그후 윌버포스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실천해야 하며, 복음 전파 외에도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쓴 [참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기독교는 가진 자에게 베풀라고 가르친다. 권력자에게 겸허하게 직책에 맞는 책임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겸허한 마음을 가져 부유함을 자랑하지 말며, 권력을 남용하지 말 것이다. 그러면 불평등으로 사회가 갈등을 겪는 일이 줄어든다. ...기독교는 또한 장차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름뿐인 기독교는 이런 일을 실현할 수 없다. 참된 기독교만이 그럴 수 있다. 겉보기로의 기독교가 아니라, 속으로의 기독교가 그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선한 일들이 실현되고, 정치가 부패하지 않게 하려면, 참된 믿음을 배양해야만 한다.”

 

이같은 신념에 따라 윌버포스는 정치를 통해서 참된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그는 영국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려진 노예 무역제도를 철폐하기 위해 필생의 노력을 다했다. 1781년에는 찰스 미들턴, 토머스 클랙슨, 한나 모어 등의 사람들과 뜻을 모아 노예제 폐지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78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 다음 해(1787) 1028일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앞에 노예 무역의 금지와 사회(풍속) 개혁이라는 두 가지 큰 목표를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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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혁의 후원자-클라팜파()

 

그 무렵 클라팜파()가 결성되었다. 윌버포스가 여러 정치인들의 도움을 받아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앞장섰지만 사회 개혁을 방해하는 장벽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의회에 상정한 입법안이 번번히 무산되었고, 이를 방해하는 여러 세력들이 있었다. 그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윌버포스는 정치인인 클랙슨, 그랜빌 샤프, 작가인 모어, 성직자 존 벤, 은행가 헨리 손턴 등과 뜻을 함께 하기로 하고, 마침내 '클라팜파()(Clapham Sect)’를 결성했다.

 

클라팜파()를 구성하는 멤버들은 정치인, 경제인, 교육가, 종교인, 문학가, 언론인 등의 각계 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그들의 신앙 배경은 대부분 영국의 복음주의였고, 20-50여명이 함께 모여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당시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성경적인 해답을 찾았다. 이들은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영국 사회 개혁에 대한 비전을 견고히 했고, 당시 사회적 크게 일조했다. 클라팜파()는 영국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전략을 펼쳤다.

 

그들 중에서 교육가들은 노예 무역 제도의 실상을 파악하여 보고했고, 언론인들은 노예 무역제도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전국에 알렸다. 법조인들은 법안을 만들어 개혁안을 제공했다. 또한 기업가들은 이를 위한 재정적인 뒷받침을 했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의회에서 노예 무역제도 폐지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클라팜파()에서 내세운 개혁 운동은 노예 무역제도 폐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공직자들의 비리, 향락적인 문화, 음주 도박의 근절, 그리고 신성모독 등을 추방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클라팜파()18세기 영국의 사회 개혁을 필생의 사명으로 알고 활동했던 윌리암 윌버포스의 정신적, 학문적, 영적,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윌버포스는 40년간의 노력 끝에 노예무역 제도를 폐지하는 등 강력한 사회 개혁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가령, 윌버포스와 클라팜파()가 내놓은 개혁안들에 따라 당시 영국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음주 도박 등이 근절되었고, 24시간 술집 영업도 폐지되었다. 관직 매매 관행도 점차 사라졌다. 가정 파괴나 범죄의 발생률도 줄어들었다. 더 나아가서 노예무역 제도가 폐지된 후 마침내 노예제도까지 철폐되었다. 대신에 영국 사회는 성서 읽기 운동이나 주일학교 보급운동 등이 확산되었다.

 

윌버포스와 클라팜파()들은 1798년부터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부르짖으면서 150차례나 의회 내 논쟁을 벌였고, 1805년까지 무려 11번이나 법안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포기하지 않았고, 클라팜파() 역시 윌버포스의 개혁안을 적극 지원했다. 특히 윌버포스는 수 차례나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을 겪었다. 심지어 오랜 투쟁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척추가 휘고, 위장병, 폐 질환, 등의 고통에 시달렸다. 많은 유산도 개혁을 위해 다 쏟아부어 재정적인 압박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버포스는 한번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안 통과가 무산될 때마다 실의에 빠진 동료들을 격려하면서 사회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807223일 노예무역 폐지법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윌버포스는 오랜 투쟁 끝에 얻어낸 놀라운 개혁의 결실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않고 또다른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그는 노예제 자체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는 또다른 개혁안을 내놓았다.

 

윌버포스가 내놓은 개현안을 바탕으로 1823년에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모임을 결성했다. 그는 노예제가 범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1825년에는 의원직을 내놓고, 뒤에서 개혁 운동을 지원했다. 그후 건강이 악화된 가운데서 윌버포스는 1833726일 영국의 모든 노예를 1년 내에 해방한다는 의회 결정 소식을 병상에서 들었다. 이로써 윌버포스는 청년 시절에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다 완수했다. 그가 평생 동안 흘린 눈물과 땀과 피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그 놀라운 기쁨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 채 사흘 뒤 눈을 감았다.

 

18세기 영국 사회 개혁을 이루었던 윌버포스와 클라팜파()는 후대에게 사회 개혁의 좌표를 제시해 주었다. 윌버포스가 보여준 사회 개혁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 윌버포스의 개혁 정신을 뒷받침하고 후원하기 위해서 힘을 모았던 클라팜파()의 역할은 오늘 한국 사회와 총회 개혁의 등불이요 모델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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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클라팜파의 역할을 통해서 본 합동포럼의 비전

 

윌버포스가 일생 동안 싸워온 사회개혁 운동과 그를 뒷받침하고 후원한 클라팜파()의 헌신은 현재 총회 개혁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모델이요, 생생한 교훈이다. 총회의 개혁은 혼자 이룰 수 없다. 개혁을 단행하려면 윌버포스의 정신으로 무장된 지도자들과 이를 뒷받침해줄만한 현대판 클라팜파()의 출현이 절실하다. 개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야 하며, 개혁의 의지를 굽혀서도 안된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성경의 가르침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라고 하면 갔고, 멈추라하면 멈췄다." 개혁의 완성은 없으며, 역사의 종말이 올 때까지 개혁은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총회 개혁은 특정인이 혼자 이룰 수 없다.

 

우리 총회는 개혁신학을 정체성으로 삼고 100여년을 달려왔다. 지난 100여년간 엄청난 저력을 쌓았다.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았고, 지금은 한국장로교회에서 장자총회의 자리를 굳혔으며, 세계장로교 총회 중에서 최대규모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엄청난 위상에 걸맞지 않고 내부적으로는 불법이 난무하고, 행정 역시 여전히 대부분 아날로그식이다. 소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담아낼 만한 그릇을 준비하지 못한 격이다.

 

정말 총회를 내 집처럼, 내 교회처럼 다듬고 갈고 빛내줄 리더가 거의 없는 상태며, 대부분 총회장, 임원 등의 감투만 차지하고 내려가면 그만인 식이니 발전이 정지된 상태다. 선진들이 피땀흘려 쌓아놓은 총회가 발전은커녕 정지된 채 시대를 선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합동포럼이 탄생했다. 윌버포스와 클라팜파()처럼 1-2년 사이에 안되면 510, 심지어 40년이라도 계속하여 개혁을 부르짖어야 하며, 더 나아가 우리 당대에 못하면 후대들에게 총회 개혁의 과제를 물려줘서 좋은총회 바른총회 품격총회를 세워서 주님을 맞이하자는 것이 합동포럼의 비전이요, 필생의 사명이다.

 

7. 결론과 제안

 

첫째, 윌버포스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40년 간 시도한 개혁운동은 합동포럼이 깊이 교훈삼아 총회 개혁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 윌버포스가 폐지를 주장하며 평생동안 싸웠던 노예제도 폐지 정신은 성경의 정신이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개혁 정신이었으묘, 칼빈이 심장을 드려 개혁을 시도한 제너바 개혁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합동포럼이 내건 총회 변화와 개혁 정신은 윌버포스처럼 끈질기게 시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둘째, 합동포럼이 지향하는 좋은총회, 바른총회, 품격총회는 윌버포스의 개혁운동을 뒷바라지하고 지원한 클라파와처럼 지속적인 후원과 관심 그리고 마음을 모은 협력이 있어야 한다. 합동포럼의 모든 멤버들을 대신해서 총회를 섬기기 위해 나선 일꾼들을 뒷바라지하되, 필요한 물질, 미래전략, 개혁정책 등을 위해 멀티후원 시스탬을 강력하게 구축해야 한다.

 

셋째, 합동포럼이 지향하는 총회의 변화와 개혁은 말이나 구호 혹은 전략과 정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드리는 뜨거운 기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따라서 합동포럼이 개혁 운동이 결실을 맺어 좋은총회 바른총회 품격총회를 이루기 위해서 하루 한끼 릴레이 금식기도를 제안한다. 한 회원이 매일 아침 한끼씩 금식하되 365일 릴레이 아침 금식을 기도로 이어가면서 오직 기도와 부흥을 통한 총회 살리기와 총회 개혁운동을 주도해 갈 것을 제안한다. 기도 외에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넷째, 총회 개혁과 변화를 위해 모든 맴버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함께 기도하되, 뜻을 같이하는 멤버들을 확보하여 기드온 300용사처럼 장기적으로 <300인 동지>를 결성하여 총회 살리기 운동을 펼쳐나갈 것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총회 개혁과 변화를 위해 개혁신학을 바탕으로 한 동지적 관계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윌버포스와 클라팜파가 되어줄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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