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자신을 죽여야 목회가 된다.
정치를 하니, 정치가 재미가 있었다. 그 재미로 정치를 하니,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는지도 몰랐다.
언론은돈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이길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을 김만규 목사로부터 듣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아마 기사를 읽는 전국 목사 장로들도 일간 어색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른에게서 듣는 가르침은 작지 않는 지혜가 있다. 김만규 목사께서 “정치를 하니,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는지도 몰랐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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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3년 3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영등포에서 양지캠퍼스로 등·하교가 너무 힘들었다. 선배들의 도움으로 총신원보사 수습기자로 들어갔다. 오직 기숙사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총신원보사는 원우회와 함께 김만규 목사 타도를 외치며 언론을 사명을 감내하고 있었다. 나는 1학년 수습기자이지만, 원보사 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선배들의 투쟁에는 크게 알지 못했다. 그저 나이 적은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흘러갔다. 나는 2010년 장로신문에 들어가면서 총회회관에서 거의 30년 만에 김만규 목사를 만났다. 그때 김만규 목사가 나를 향해 “총신원보사, 니들 때문에 내가 고생 많이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부터, 이상하리만치 나는 기자로서 단 한 번도 김만규 목사와 같은 뜻, 같은 편에 서지 않았다. 장로신문 기자로서, 장로들만 바라보고 목사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교회분쟁, 노회분쟁, 총회 교권싸움에서 단 한 번도 그와 뜻을 같이 하지 않았다. 묘하게도, 송삼용 목사와도 단 한 번도 교회 분쟁, 노회 분쟁 그리고 총회 정치 논란에서도 같은 입장을 같이 한 적도 없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를 의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장로들의 의견과 입장을 따라 가보니, 김만규 목사와 송삼용 목사와는 항상 다른 편, 다른 의견에 서 있었을 뿐이다. 그런 김민규 목사는 2021년 새해가 되면서 찾아볼 마음이 생긴 것도, 순전히 내 뜻이 아니었다. 한 기자가 총신대학교에서 제안하기를, 설날이 오기 전에, 거동이 불편한 김만규 목사를 한 번 찾아뵙자고.... 나는 이를 받아들이고, 날짜와 시간을 공지했다. 그러나 너무 일방적이었는지 몰라도, 방문을 제안한 기자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참석하지 않았다. 다행히 개혁타임즈 김창연 기자가 ‘이런 자리는 꼭 가야 한다’며 서울 오류동 금강수목원아파트를 찾아왔다. 다행히 김만규 목사께서는 걷는 것이 조금 불편했지 매우 건강했다. 기자들은 ‘김만규 목사! 살아있네’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김만규 목사는 연신 ‘미안하고, 고맙다’란 말씀을 하셨다. 김만규 목사의 연세는 93세, 주민등록으로는 90세이다. 기자들의 방문에 다과를 내놓으신 사모님도 매우 건강해 보였다. 부친을 도와 기독신보를 제작하는 그의 장남도 59년 생으로 총신대학교와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당시 아들은 총신대학교 사당캠퍼스에서 ‘이사 타도! 김만규 타도!’를 외치며 데모에 앞장섰다. 부친 김만규 목사는, 학내 데모를 막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했다. 김만규 목사는 6.25한국전쟁에 참여한 학도의용병이다.
그에게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4에 직접 쓴, 친필 ‘義勇千秋’가 있다. 그는 6.25한국전쟁 시 학도의용군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공군으로 자원입대하기도 했다. 김만규 목사에게는 3개의 군번이 있다. 학도병 군번은 ‘0382012’이다. 전사자 명단 군번은 ‘3600916’이다. 학도의용군으로 참여해 전사했다며 부여받은 군번이다. 3사단 명예제대증 군번은 ‘1950911’이다. 1950년 9월 11일 3사단이 포항전투에 학도병으로 참여했다며 자체 부여한 군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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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진행하면서, 93세의 김만규 목사의 기록과 기억이 다소 오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를 읽을 때, 감안해서 읽기를 바란다.
목회란?
목회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자신을 죽여야 목회가 된다. 목회자가 살면 목회가 안 된다. 창피하지만, 어렵지만, 그 자리에서 죽을 각오를 해야지 예수가 살아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는 보이지 않는다.
나도 그 경험을 했다.
큰 교회는 아니지만 12개 교회에서 시무했다. 내가 나 자신을 죽이고 투자를 하니까, 교인들이 잘 됐다.
나의 첫 교회는 경북 외관 약목에 있는 교회였다. 그 교회에 가니, 교인은 5명이었다. 당시 김 씨 성을 가진 영수(領袖)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대구신학교를 다니면서 토요일 교회에 가서 동네 집집마다 심방을 다녔다. 심방을 가보니, 그 동네 사람들마다 이전에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교회를 떠날 58년 때는 교인이 35명이 됐고, 나는 1958년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 후에도 나는 개척교회를 여러 곳을 시무했고, 안정된 교회에서도 시무했다. 그 중에서 대구 노곡교회와 경북 고령 원송교회가 가장 안정된 교회였다. 노곡교회에서 시무할 때는, 내게서 치유의 은사가 나타났던 모양이다. 당시 교회마다 환자들, 특히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때! 다 고쳤다. 귀신을 다 쫓아냈다. 그러니까, 교회가 되더라고.
그러므로 목사가 힘들어도 죽는데 까지 가야지 교회가 된다. 편안하게 가면 안 된다.
정치는?
정치는, 정치마당에 나서기 전에, 먼저 그 분위기와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 어떤 사건이 있으면, 먼저 그 사건을 자세히 알고, 다른 사람들이 찾기 이전에 법도 찾고, 역사적인 기록도 찾아보고서 총회 현장에서 발언을 하면, 그 누구도 거역하지 못한다.
나는 총회에서 말썽도 많이 냈지만, 내 발언을 꺾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박병진 목사와 법률다툼을 가장 많이 했다. 그러나 대부분 이북 정치 목사들은, 나를 보고 도망을 갔다.
1960년 초, 내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그때 나는 총회 ‘중혼자처리전권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전권위원은 이영수, 추국원, 김만규, 이종근(이상 목사), 이동근 권운현(이상 장로) 등 9인이 선출됐다. 당시 경북노회에서 제일 발언권이 센 김만규 목사가 위원장이 되고 서기는 이동근 장로가 됐다.
‘중혼자처리전권위원회’는 불과 1개월에 6개 교회에서 5개 교회 장로들은 스스로 장로직에서 물어났다. 단지 1개 교회 장로만이 중혼자 처리에 반대 목소리를 내다가 결국 장로 면직을 받았다.
이때 목사 중에는 대구북성교회의 조충식 목사가 혐의가 있어 3개월간 조사했다. 하지만 조충식 목사는 평양에서 월남할 때 총각이었고 목포로 월남하여 목포에서 서울로 다니며 총신 52회로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분명한 것은, 이처럼 내가 먼저 알고, 내가 이행한 일을 꺾을 사람은 없었다.
그 중에서 기억나는 여러 사람이 있다.
혹부리 목사와 휠체어 목사
전북 김제에서 목회하는, 얼굴에 혹이 난 혹부리 목사가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목회하는, 두 다리를 잃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목사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이 강도사 고시를 치렀다.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당시 고시부장 대구의 서 목사는, ‘두 사람이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불합격 처리했다.
그때, 나는 고시부와 다투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두 사람을 만나 묻기를, ‘두 사람은 고시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런데 왜 불구자로서 목사가 되려 하는가?’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두 사람이 ‘불구자에게는 불구자 목사가 필요하지, 다른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결국 1985년 제70회에서 이 사실을 알렸다. 이때! 장로들이 큰 박수를 치면서 “합격하기로...”라고 화답했다. 지금도 혹부리 목사는 총회에서 활동하면서, 몇 번이고 내게 감사 인사를 하며 지낸다. 그런데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목사는 단 한 번도, 내게 인사한 적이 없었다. 총회 정치 현장에서는, 내 마음에 자신이 있다면 용감하게 나서면 이긴다.
내가 총회 정치하면서 약 40여개를 발의해서 고친 사실이 있다.
총일찬송가 261장
그 중에 하나가 통일찬송가 261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김재준 박사(1901-1987)가 작사한 반정부운동가라는 사실을 총회에서 지적했다. 이에 총회는 이 곡을 찬송가에서 삭제했다.
군산개복교회 김 목사가 10계명 변칙 강의를 하고 있었다.
하나, 하나님을
이, 이상한 귀신을 섬기지 말라.
삼, 삼가 조심해서 바로 살아라.
사, 사사로운 일로 주일을 어기지 말라.
이런 식으로 교인들을 세뇌했다.
그런데 그 강의를 듣던 교인들이 반발했다. 결국 총회에까지 문제가 됐다. 그러자 김 목사가, 나를 찾아와서는 ‘김 목사, 이번 수요일에 우리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나의 10계명 강의를 변칙이라고 하는데, 변칙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강의안을 달라고 해서 살펴보니, 변칙강의가 맞았다. 그래서 나는 김 목사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총회 현장에서 ‘이 강의는 이단이다. 이런 강의는 안 된다’고 발언했다.
새번역 성경
새번역 성경이 나왔을 때도, 당시 총회신학부장 정 목사에게 ‘이 새번역 성경은 안 된다’며 발의를 했다. 그리고 서울, 대구, 부산, 광주, 대전 5개 도시를 다니면서 새번역 성경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정치이다.
정치는 인물, 지도자를 뽑는 게 정치가 아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것도 정치이다.
‘축도’ 문제가 있었다.
당시 서울 양문교회 주 장로가 엉뚱하게도, 축도를 ‘있을지어다’가 아닌 ‘축원합니다’라고 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이 문제로 주 장로는 이윤근 목사와 많이 논란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내가 나서서 ‘있을지어다’를 유지했다.
이렇게 정치를 하니, 정치가 재미가 있었다. 그 재미로 정치를 하니,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는지도 몰랐다.
언론과 기자에 대해?
우리 총회 기관지 주간기독신문이, 망발하고, 죽을 짓을 해도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관지가 아닌 언론들이 이에 대한 기사를 쓰면 덤벼든다. 정말로 잘못됐다. 절대로 잘못됐다.
변호인 제도
권징조례 27조에 의하면, 변호인 제도가 있다(제27조 1항 ‘본 장로회 목사 혹 장로 아닌 자를 변호인으로 선정하지 못할 것이요.....’ 정치문답조례 제355문 ‘본 노회 소속 목사, 장로 중에서 변호인을 청할 수 있고 혹은 피소된 목사가 스스로 변론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재판의 변호인은 소속 노회 또는 교단내의 목사, 장로여야 한다.
그런데 권징조례 27조 의해서 ‘모든 기독언론인들은 변호사가 될 수 없다’고 총회가 결의했다. 그 결의 후에는, ‘본 교단 목사는 변호인이 될 수 없다’고 결의했다. 그러면 누가 변호인을 할 수 있는가? 헌법이 다른 타교단 목사들이 변호인이 되는가?(총회는, 원로은퇴목사장로들은 변호인이 될 수 없다고 결의한 적이 있다. 당시 결의는 김만규 목사를 염두에 둔, 즉 특정인을 향한 결의였기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목사기자들 입장에서는 저항해야 하는데, 목사기자 언론들이 침묵하고 있다. 언론을 핍박하기 위한 결의였다.
이단 이장림의 총신대학교 강의?
시한부종말론자 이장림이 1991년 총신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제76회 총회촬요에 ‘이장림을 이단으로 규정하다’는 기록이 있고, 그 기록의 내용은 당시 평동노회장 장대영씨가 헌의한 이단규정건은 ‘이장림은 이단으로 규정한다’고 수록되어 있다. 출처 기독신보).
초청자는 천정웅 교수였다.
당시 천 교수는, 먼저 자신의 강의에서 이장림을 이단으로 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먼저 이단 이장림이 강의를 마치고 2,30명의 청년들로부터 호의를 받으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후부터, 이장림은, 자신이 총신대학교에서 강의했다며 국내는 물론 미국 그리고 세계를 다니면서 홍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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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규 목사는 이 일에 대해 2011년 12월 27일 기독신보 “감추인 합동총회 역사(10) 總會野史 뒤안길의 이야기들-이단 좋아하네. 교수님들. 총신에서 이장림을 강사로 전교생 수업받다”란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자세한 기사를 남겼다. 이 일로 인해 두 가지 안건이 이사회에 상정되었다. 교수들은 이사회에 김만규 이사가 교수회를 쳐들어와서 교권을 침해하였다고 이사장에게 보고하였고, 필자는 총신대학교 학장과 보직자들이 이단 이장림을 초청하여 특별수업을 하였으니 처벌해달라고 보고하였다. 두 보고는 즉시 반응을 일으켜 총신 교수와 학생들은 '김만규 이사 물러가라'는 프랭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였고, 이사회는 긴급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학장과 천정웅 교수와 함영용 교수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이 건은 제76회 총회에 보고하고 이 사건에 관련된 교수들은 경고 조치를 하고 총회는 '이장림은 이단이다'고 결의를 하였다. 그런데 학생들은 필자 때문에 교수들이 징계를 받은 데 대하여 계속해서 '김만규 이사 퇴진' 데모를 하는 중 필자를 총신대에 납치하여 두 팔을 뒤로 꺾고 끌고서 총신 신관 계단 앞으로 끌고가 2시간 동안 인민재판을 하였다. 학생이 규탄 질문하고 필자는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필자에게 통일교 앞잡이라고 하고 또 박윤식 앞잡이 또는 횡령착복한 도적놈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하나하나 변명하고 답하였다. 이때 옆에 학장(필자의 총신 동기생임)과 부학장(6.25 전우) 교수 보직자가 있었으나 아무도 필자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데모하던 학생들은 ‘에이, 김만규는 말로 못 이기겠구먼. 김만규의 자동차를 때려부수자’고 하고는 당시 기아 케피탈 신형 차 위에 올라가서 한 달밖에 안 된 그 자동차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그런 후에 필자는 그 험악한 속박에서 풀려났다. 그후 필자는 재단이사장 백남조 장로와 사무국장 문원채 장로, 학장 박영희 교수에게 민형사로 고소를 제기하겠다고 하고 완파된 차량을 새차로 교체한 일이 있었다. 총신 교수. 과연 이단을 알고 있기나 한가? 그리고 이단을 정죄할 자격이나 실력이 있는가? 당시 이장림을 총신에 강사로 청한 것은 천정웅 교수의 영웅심, 즉 갈멜산상의 엘리야처럼 학생들 앞에 이장림의 재림설의 허구를 들춰내어 까뭉게 보겠다는 얕은 꾀로 덤벼들었으나 도리어 이장림의 술수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장림은 자기 말만 하고 총신을 벗어났고, 이날 후 이장림은 미국으로 가서 2개월간 미국의 각 지역에서 다미선교 세미나를 할 때마다 각종 신문에 ????이 기사는 본인이 한국의 총신대학교에서 전교생 앞에 강의를 한 총신대학교의 강의다????라는 설명을 붙이고 총신에서 한 강의 사진을 게재하였다. 신문은 전면 2면으로 되어 미주에 교회들이 '총신대학교는 이단강의를 하는 신식학교'라고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
언론의 무기는 진실이다.
언론은 진실로 승부해야 승리한다. 그러나 지금의 언론은 진실이 무기가 아니라, ‘교통비’가 얼마인지에 달려있다.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언론이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선을 넘으면 가치가 없어진다. 언론은 돈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이길 수 있다. 지금 언론이 그렇지 못하니 너무 어렵다. -끝-
<정리-최성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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