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아카데미】 하나님과 알라는 다르다-삼위일체 하나님과 단일 신 알라의 차이점- 기사입력 2020.12.14 11:34 댓글 0 김영한 교수(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상임대표/숭실대 명예교수) II. 단일신 알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다. 이슬람이 말하는 알라 개념은 “단일인격적 유일신”(unipersonal monotheistic god)인 반면에 기독교의 하나님의 개념은 “삼인격적 유일신(tripersonal monotheistic God)”이란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슬람의 알라는 아들도 성령도 없는 신이다. 이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공격한다: “성경의 백성들이여,...알라와 선지자들을 믿되 삼위일체론을 말하지 말라 너희에게 복이 되리라”(Sura 4:171) “하나님이 셋 중의 하나라 말하는 그들은 분명 불신자라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신이 없거늘 만일 그들이 말한 것을 단념치 않는다면 그들 불신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벌이 가해지리라”(Sura 5:73),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아들 예수야 네가 백성에게 말하여 하나님을 제외하고 나 예수와 나의 어머니를 경배하라 하셨느뇨 하시니 영광을 받으소서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아니했으며 그렇게 할 권리도 없나이다...”(Sura 5:116), 삼위일체라면 단지 “알라, 마리아, 예수” 정도로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는 동일 본질(homoousios), 동시 선재, 동일 권능, 동일 예배 대상의 한 분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확실하게 구분 짓는 하나님의 정체성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는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1. 단일 신과 삼위일체 하나님 이슬람 신앙고백은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선언한다. 창조자를 신의 아들이나 신의 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알라와 그의 모든 천사들의 적(敵)에 해당하는 것이다(Sura 2:97-98; 5:73). 이슬람은 오직 단일하고, 유일한 신(der eine und einzige Gott)을 믿는다. 무함마드는 삼위일체 신, 하나님의 세 위격의 통일(Einheit Gottes aus drei Personen)을 다음같이 부정한다: “셋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런 말을 그치라. 그것이 너희에게 더 좋을 것이다”(Sura 4:171). 무함마드는 알라는 한 분이니 그에게 아들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로 이사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다. 알라의 선지자로서 마리아에게 말씀이 있었으니 이는 알라의 영혼이었느니라. 알라와 선지자들을 믿되 삼위일체설을 말하지 말라하니 이는 너희에게 복이 되리라. 실로 알라는 단 한 분이시니 그분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 없음이니라”(Sura 4:171). 이슬람에게는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없다(Sura 112:1-4). 알라가 아들을 "낳는다"(zeugen) 것은 불가능하다. 이슬람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알라가 인간인 마리아와 성(性)관계를 통해 예수를 낳았다는 것은 천벌을 받을 신성모독으로 여긴다. 이슬람에 의하면 알라는 항상 하나이고 둘이나 셋일 수가 없다. 무슬림은 알라를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멀리 떨어진 초월적 존재로서 표상하기 때문에 알라를 아버지로서 이해할 수 없으며 더구나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초월적 존재인 알라에 대한 모독으로 여긴다. 이러한 이슬람의 유일신론(monotheismus)주장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극단적으로 반박하고 수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성부 하나님, 성모 마리아, 성자 예수로 구성되는 “삼신 가족”(Dreigötterfamilie)으로 구성되는 다신론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진술에 있어서 니케아-콘스탄틴노블 신조(Nicaeno-Constantinpolitanum)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는 ousia(ούσία)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하나님의 위격 구별에 대해서는 hypostasis(ύπόστασις)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하나의 본질에 세 위격”이라는 공식은 “파괴될 수 없는 일체”요 동시에 파괴될 수 없는 구별“로서 ”상호내재“(perichoresis)로서 이해된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독립적이거나 서로 바뀔 수 없는 하나의 본질이시며 세 인격이시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성령이 지니신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다는 동질(homoousios)개념이 중요하다. 2. 알라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가 아내나 아들을 가지지 않는다며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강하게 부정한다: “...실로 알라는 단 한 분이시니 그분에게는 아들이 있을 수 없노라...”(Sura 4:171).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주님으로 아내도 그리고 자선도 두지 않으신 분이라”(Sura 72:3). “알라께서 자손을 두셨다 말하는 자들이 있더라. 실로 저들은 불결한 주장을 하노라”(Sura 19:88-89).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자손이 있다고 불결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손을 가질 필요가 없으시매” (Sura 19:91-92).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는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성육신하신 예수를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인 동시에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예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요 17장), 그를 믿는 성도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요 1:12). 이것은 구원받은 자의 특권이다(롬 8:14-17).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위는 서로 바뀔 수 없는 하나의 본질이시며 세 인격이시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구별(Selbstunterscheidung)’이란 ‘자기 분리’의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이실 수 있으며(요일 4:16), 인간에게 오시며 우리와 관계하신 하나님 즉 ‘우리를 위한 하나님(Gott für uns)’으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 호칭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호칭하도록 한 것이다(마 6:9).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것이다.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유대인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1:12)가 된다. ‘하나님의 양자’로 인정되었으므로(롬 8:15)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세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무슬림들의 생각과 같이 인간의 신격화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 아들의 대속하심을 통해 속죄함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하나님 사이의 새로운 관계 개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이자 친밀성 개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는 하나님 자신의 영인 성령이 개입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짓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4-16). 3. 존엄한 절대군주와 자비로우신 주권자 이슬람은 알라의 전능(All-Macht)과 존엄성(All-Erhabenheit)을 강조한다. 알라는 피조세계와 완전히 구분되는 신으로서 결코 인간 세계 가운데 거하지 않으며 세상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알라는 인간에게 “바로 알라만 경배하고 그 분에게만 순종하는” 이슬람의 법을 부여했다. 알라는 절대군주이며 용서하고자 하는 자를 용서하고 유혹하고자 하는 자를 유혹한다(Sura 6:39). 알라가 유혹하는 사람은 어떤 대리인이나 보증인이라도 그를 도울 수 없다(Sura 4:88). 인간을 알라에게 나아가게 하는 중보자는 없다. 알라는 경건한 자는 사랑하나 죄인을 증오한다. 무함마드는 메시지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만 구원자일 뿐이다. 그리하여 알라와 인간을 매개하는 어떤 다리도 없다. 성례전이나 성화나 종교음악도 매개하지 못한다. 알라는 초절적(transzendent) 존재이다. 알라의 개념에는 그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자녀라는 표상이 없다. 그리고 이슬람에는 알라의 사랑에 대한 표상이 없다. 알라의 뜻에 대한 복종과 헌신(Islam)만이 있다. 그래서 알라의 긍휼과 은혜는 기독교에서처럼 죄인에 대한 무조적인 사랑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지키는 충성된 자에 국한된다. 알라의 초절적 존엄성과 영원한 불변성은 그가 행위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행치 아니하고 영원 전부터 그의 말씀이었던 것을 단지 알리는 것으로서만 유지될 수 있다. 이러한 이슬람의 사고에는 이념과 현상, 영원과 역사를 분리하는 희랍의 플라톤적 이원론적 사고가 깔려 있다. 유해석 이슬람 전문선교사는 다름같이 피력한다. “하나님과 세상이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면에서 꾸란의 알라는 자연신앙적이며, 정통 이슬람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교제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비스러운 주권자로서 그의 독생자를 십자가상에서 인류구속의 대속물로 주신 자비의 하나님이다. 그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은혜의 주권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인 우리 인류의 중보자(der Mittler)이시다. 중보자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에 가까이 나아간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순종이다. 그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먼저 사랑하셨다(요일 4:9). 하나님은 사랑이다(요일 4:8).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엄성은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대속하셔도 훼손되지 않으신다(요 1:15). 그는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행위하셔도 그의 영원한 존엄성은 그대로 보존하시는 초월적이며 주권적인 하나님이시다. 4. 알라의 숙명적 예정과 하나님의 유기적 예정 무슬림의 율법학자는 알라가 사람이 아직 모태에 있을 때 각 사람의 운명을 예정했다고 말한다. 알라의 결정에 대항하여 투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 생애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늘에서 이미 기록된 것이다. 이 기록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알라가 우리에 대하여 목록을 적어두신 것 이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슬람은 십자가의 대속이나 인간의 화해를 위한 죽음에의 예정이란 없다고 믿는다. 무슬림은 다음같이 고백한다. “선과 악이 알라의 예정과 선(先)결정을 통해서 실현된다.” “불신앙자의 불신앙, 불경건한 자의 불경건, 악행도 알라의 예지와 의지, 예정과 결정으로 일어나나 알라가 허가하거나 허락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슬람의 예정이란 구속론적인 관심보다는 철학적 관심에 주도된다. 예정보다는 선결정이 중요하다. 알라의 절대적 존엄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처럼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알라의 의지에 의하여 미리 정해지고 무슬림은 그것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숙명주의로 나아가게 한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의 예정론은 숙명론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적 행위와 책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찬양을 강조한다. 그것은 자연적 재난과 인간의 역사적 행위를 자유롭게 허용하시면서 신비롭게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그분의 오묘한 섭리와 주권에 대한 찬양을 증언한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우신 주권적 섭리에 따라 우리의 의지와 반응에 인격적으로 반응하신다. 하나님은 니느웨성을 파멸시키고자 했으나 요나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한 후에 니느웨 왕들과 거민들이 베옷을 입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 성에 대한 심판의 뜻을 거두신다. 이에 대하여 항의하는 요나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음 같이 대답하신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0-11). 예수도 빌라도가 행한 갈릴리 사람들 학살 사건과 실루암 망대 붕괴사건을 들면서 사람들의 책임을 언급하신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1-5). 갈릴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의 희생제물을 바치려고 했을 때 총독 빌라도가 이를 민족주의적 반역으로 보고 그들 중 얼마를 학살한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은 사고가 있었다. 이러한 사고에 대하여 예수는 인간의 책임을 주지시킨다. 이들의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시고 있다. <저작권자ⓒ합동기독신문 & www.ikidok.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BEST 뉴스 위로 목록 댓글 작성을 위해 로그인 해주세요.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