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추억하다】 12월의 인물-성산 장기려 장로
장로는 못 본체 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111년 서울 산정현교회(김관선 목사) 주보에는 1938년 건축된 북한에 있는 산정현교회 예배당과 주기철 목사, 고당 조만식 장로 그리고 성산 장기려 장로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산정현교회는 해마다 4월이면 주기철 목사를, 10월이면 국립현충원에서 고당 조만식 장로를 추모한다. 그리고 12월이 오면 성산 장기려 장로를 추모한다. 장기려 장로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에 주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12월 10일(주일) 오후 2시 30분 “성산 장기려 장로 제22주기 추모예배”를 가졌다.
성산 장기려 박사
그는 산정현교회 장로이다. 장로는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에 모든 가족을 두고 남하했다. 그 아픔에도 불구하고 장로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사라진 땅에서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의 도전은 혁명이 됐다. 장로에게 의술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었다. 아프고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장로 의사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장로의 무료 의술 정신은 6.25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산 영도다리로 몰려들었고, 장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평양에서 김일성대학 의대 교수까지 지냈던 장로였지만 굶주림과 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병원 한 번 못가고 병마로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피난민들을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제3육군병원에 있던 장로는 1952년 대형천막 3개를 얻어 천막병원을 열었다. 당시 미국 유학생 정혁창이 5.000달러를 모금한 것이 큰 힘이 됐다. 비록 천만진료소였지만 피난민들에게는 꿈같은 병원이었다. 그곳이 바로 오늘날 암치료전문병원으로 자리한 부산복음병원이다. 그곳에는 여전히 장로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1956년 복음병원은 침상 30개를 갖춘 현대식 대형병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전쟁 내내 무료진료를 한 장로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를 담아 부산시민들이 모금해준 결과이다.
장로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렸지만 그것은 장로에게 커다란 시련으로 다가왔다. 젊은 날을 바쳐 일군 복음병원에서 재정적자를 이유로 70세 정년을 5년 앞당겨 65세에 물러나게 됐다.
하지만 장로는 좌절하지 않고 청십자의료원을 세웠다. 청십자의료보험 회원들을 위한 새 병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68년 세운 청십자의료보험은 돈이 없어 병원 문턱에도 못가고 비싼 사채를 끌어 써야했던 환자들을 위한 오랜 염원의 결실이었다. 농촌운동가 최규철이 덴마크 유학시절 유럽의 의료보험 제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한 청십자의료보험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의료보험이었다.
장로가 마지막까지 진료했던 청십자의료원, 그곳에는 ‘장 박사 진료 신청서’가 따로 있었다. 말기암 환자들은 장로를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었다. 때문에 장로는 뇌졸중으로 눈 한쪽이 마비됐어도 진료를 멈추지 않았다.
장로는 평생 의사로 살았지만 집 한 칸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의사였다. 정년퇴직 후 복음병원에서 마련해 준 병원 옥탑방이 그의 마지막 거처였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장로의 쉼터가 나온다.
1995년 12월 25일 눈이 내리던 성탄절 새벽, 그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장로 나이 85세였다. 무소유와 사랑,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애도했지만 장로는 이 땅에서의 소임을 다하고 기쁘게 그의 영원한 왕국으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장로는 이 땅에서 무엇이 기억되길 원했을까. 그가 남긴 커다란 병원도 아닌, 의사로서의 업적도 아닌 빈부귀천을 넘어 생명은 오직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믿음, 사랑은 베풀수록 커진다는 진리, 그것이 생명의 소중함이 점점 더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장로가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의사 장기려는 산정현교회 장로이다.
추모예배는 산정현교회와 성산 장기려기념사업회(이사장 손봉호 장로)가 주관한다. 예배는 장기려기념사업회 부이사장 이건오 장로의 인도로 기도는 이사장 손봉호 장로, 설교는 김관선 목사가 전했다(못 본체하지 마라, 신22:1-4). 김 목사는 장기려 장로의 일생을 한 마디로 정리한 “못 본체하지 마라”는 설교에서 “추모예배는 단순히 한 개인을 우상화하거나 기념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자리이다”라고 전했다. 그렇다. 장기려 장로의 일생은 못 본체 하지 않은 인생이었다. 임마누엘찬양대는 윤동주의 곡 “십자가“를 찬양했다.
윤동주의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장기려기념사업회 이사장 손봉호 장로는 기도에서 “넘치는 은혜를 주셔서 그 사랑을 실천하게 하시고 우리의 본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간구했다.
임학(장기려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복음병원장은 추모사에서 “장기려 장로는 평생 예수를 닮고자 했고 이 사회의 경건한 어른이었다”라며 “장기려 장로가 내건 부산복음병원의 핵심가치는 섬김, 탁월, 순결, 유연이다. 복음병원이 장기려 장로의 뜻을 계속 이어가겠다“고 전했다.
유족대표로 장기려 장로의 손자 장여구 교수(인제대 의과대)도 자리를 함께 했다. 장기려 장로 가족은 4대째 의사가문을 이어가고 있다.
산정현교회 성산 장기려 장로
본관은 안동이다. 1911년 8월 14일(음력) 출생하고 1995년 12월 25일(월) 성탄절에 소천했다. 부장운섭 씨와 모최윤경 씨의 차남으로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 739번지에서 태어났다.
1928년 3월 개성송도고등보통학교 졸업
1928년 4월-1932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1932년 4월-1940년 2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조수 및 강사
1940년 3월-1945년 8월 평양연합기독(기홀)병원 외과과장
1940년 9월 19일 일본 나고야제국대학 의학박사학위 취득
1945년 11월-1946년 12월 평양도립병원 원장
1947년 1월-1950년 11월 평양의과대학 외과교수
1950년 12월-1951년 6월 부산 제3육군병원 외과근부(군속)
1951년 7월-1976년 6월 부산복음병원 초대원장(설립)
1953년 3월-1956년 9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교수
1956년 거창고등학교 이사
1956년 9월-1961년 10월 부산대학교 의과대 외과교수 및 학장
1957년-1988년 신앙생활 성경모임인 정기간행물 ‘부산모임’ 발행
1959년 한국 최초로 간암에 대한 대량 간 절제설 시행
1965년 3월-1972년 12월 서울 카톨릭의과대학 외과교수
1968년 4월-1979년 12월 부산복음간호전문대학 학장
1968년 5월-1989년 6월 청십자의료보험조합 설립(대표이사)
1974년 2월 한국 간 연구회 창립 및 초대회장
1975년 8월-1983년 10월 청십자병원 설립(원장)
1976년 4월 부산복음병원 원장 정년퇴임
1976년 5월 거제도 고현보건원 봉사
1976년 10월 부산아동병원장 겸 이사장
1976년 11월-1993년 4월 한국청십작사회복지회 대표이사
1979년 3월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부산 백병원 명예원장
1983년 3월 청십자병원 명예원장
1985년 3월-1994년 12월 한국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장
1993년 4월 한국청십작사회복지회 명예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