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암(海岩) 김만규 목사의 성역 70년 회고록
-한국 최대 교단의 역사기행-
해암(海岩) 김만규 목사의 성역 70년 회고록이 나왔다. 부제목은 “한국 최대 교단의 역사기행”이다. 왜 성역 70년일까? 해암이 중학교 3학년 때인 1949년 4월 19일 제35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회집됐다. 그때 중학생 신분으로 대구제일교회 강대상과 총회장 최재화 목사와 대구제일교회 한병혁 목사를 지킨 사실과 난장판이 된 제35회 총회를 수습하는데 참여하게된 것이, 해암은 자신의 성역 시작이라고 밝혔다. 때문에 해암의 이런 엉뚱함과 억측이 그의 매력인 동시에 한계라는 지적이 많다. 때문에 해암 성역 70년사는, 비록 해암 자신은 정사(正史)라 할지 모르지만, 야사(野史)라고 읽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해암 70년사는 正史와 野史 사이에 있다.
해암(海岩) 김만규 목사의 성역 70년 회고록에 대한 많은 이들의 찬사가 있었다. 총20명이 나서 해암을 찬사했다. 교회연합신문 강춘오 목사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정의로운 성격의 소유자”, 세광교회 권영만 목사는 “광야의 소리와 같은 김만규 목사”, 증경총회장 김도빈 목사는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선도자”, 안양동부교회 김동권 목사는 “교회를 사랑한 현장형 법 전문가”, 대광교회 김진수 목사는 “어둠 속 한 줄기 빛과 같은 김만규 목사”, 한국교회헌법문제연구소 소장 박병진 목사는 “뛰어난 혜안으로 명암을 꿰뚫어보는 해암”, 대전중앙교회 박정하 장로는 “형, 건강하세요”라고 글을 시작했다. 한우리교회 석병규 목사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후암교회 손상률 목사는 “풀기도 하고 맺기도 하는 궐 밖 정승 같은 김만규 목사”, 호석출판사 대표 원용국 교수는 “교계 발전과 언론 문화에 크게 공헌한 김만규 목사” 쓴소리 이윤근 목사는 “원칙과 철학으로 평생 정론을 펼친 김만규 목사” 전 한국군종목사단장 이윤희 목사는 “거센 파도에서도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해암 김만규 목사”, 소원교회 임은하 장로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분”, 총신대 명예교수 정정숙 박사는 “불굴의 사람, 김만규”, 중앙교회 정학 목사는 “선배이고 스승이신 김만규 목사”, 전 국제기독교연합회 본부선교사 조영업 박사는 “철두철미하고 애국자며 시대의 나침반, 김만규 목사 해운대교회”, 최성달 목사는 “삼각산 건들바위를 엎은 동기생 김만규 목사”, 황해노회 증경노회장 최성용 목사는 “강직하며 동정심 많은 김만규 목사”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총회 총무 최우식 목사의 “해암 김만규 목사를 생각한다”는 냉철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海岩 김만규 목사를 생각한다.
김만규 목사의 호는 해암(海岩)이다. 보통 바다의 바위를 지칭하는 말은 해암(海巖)이다. 바위 속 바위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위를 다니는 배들에게는 위험한 존재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총회에서 해암의 존재가 그랬다. 바다 위로 돌출된 바위는 낚시꾼들에게는 좋은 사냥터가 되어주지만 물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그 바위 위에 낚시하느라 보면, 종종 고립되는 경우도 있었다. 해암은 즐거운 낚시터도 됐지만, 그를 따르다가 종종 낭패를 보기도 했다.
海岩의 岩은 巖의 속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岩이 사실 巖이었다. 해암은 巖처럼 웅장하고 높고 경험 많고 그럴 듯한 바다 바위가 아니다. 그는 단지 岩처럼 큰 산 하나(총회) 머리에 이고 있는 작은 돌에 불과하다.
巖가 岩은 단지 바위만 뜻하지 않는다. 언덕, 벼랑, 굴(窟), 석굴(石窟), 낭떠러지, 가파르다, 험하다 그리고 높다는 뜻도 있다. 이처럼 海岩은 누군가에는 기댈 수 있는 작은 언덕이 되기도 했지만, 그 누군가에는 벼랑 끝 낭떠러지가 되기도 했다.
海岩은 애굽 왕국의 모세처럼 아주 좋은 기반에 있기도 했고, 미디안 광야의 모세처럼 아무 것도 아닌 사람도 되었다가, 40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의 면모도 갖추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海岩은, 어쩌면 모세처럼 끝내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영광과는 이미 너무 멀리 있지 않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