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간석교회 이국성 장로
1997년 3월 인천 간석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은 이국성 장로. 그는 고려대 임상병리학과를 졸업하고 군 제대 후 몇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1977년 32살에 결혼을 했다. 2년 뒤인 1979년 3월부터 전북 익산 원광보건대학교에서 전공을 살려 대학 강단에 서게 됐다. 비록 원광대학은 원불교종단에 의해 설립된 대학으로서 타 종교에 비판적이거나 그다지 배타적이지 않고 관대했다. 그러나 2~3년이 지나자 교직원들에게는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수요법회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원불교가 어떤 종교인지 와서 참석해보고 판단해보라는 권유는 늘 지속됐다. 심각한 신앙적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5년 만에 원광대학교를 떠나 안산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35년 동안 강단을 지키고는 2014년 2월, 만65세로 정년 은퇴했다. 이국성장로의 전공은 임상생화학이다. 임상생화학은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을 토대로 병리의 현상을 생화학적으로 진단하는 학문이다.
원광대학교에서 안산대학교로 자리를 옮길 때에 있었던 일을 이국성 장로의 간증을 통해 들어본다.
“32살에 결혼해서 독립하고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대학선배의 추천과 권유로 교수초빙을 통해 1979년 3월부터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원불교재단 원광대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신앙적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감리교재단 안산대학교에서 보건대학을 신설하고 임상생화학전공교수를 초빙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저 기독교 학교에서 일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안산대학교 문을 두드렸다. 교원 인사위원회를 통과한 후 당시 학장이 직접 면접했는데 이미 전 대학에서 조교수라는 교육경력자이면서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서 박수치며 환영을 받았다. 그렇게 1983년에 안산대학교로 옮겨가 31년을 더 근무했다.”
모태신앙인 이국성 장로의 부친은 이봉래 목사이다. 이 목사는 사업과 신학을 오가다가 늦게 국내 목회를 시작했고 경기도 연천교회에서 18년간 사역하고 은퇴했다. 영어에 능통했던 이봉래 목사는 GMS 해외선교사로 파송 받아 오스트리아 비엔나 중앙교회에서 5년 동안 목회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미국 하와이에서 10년간 더 사역하다 86세로 2008년 그 곳에서 소천했다.
다시 이국성 장로의 말이다. “부친께서 목회와 사업을 오가던 시간이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이었다. 그 기간 동안 가정에 수입이 없어 학비 마련이 너무 힘들었고 경제적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비록 그 시절이 절대빈곤의 시대였지만 아버님이 목회와 생업을 꾸려가느라 고생을 더 한 것 같다.” 특히 이 장로가 중학교 1학년 무렵에 부친 이봉래 목사가 남산신학교(당시 1회)에 복학하면서 가족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어머니가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빈곤의 삶이었다.
사진 우측부터 이국성 장로, 아내 김기자 권사 그리고 딸, 며느리 그리고 의자 위에 아들, 손녀, 손자
이국성 장로에게 간석교회는 어떤 의미일까? “교회는 마음의 평안을 유지해 주는 곳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아도 그리고 그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교회에서 얻는 기쁨만 하겠는가. 막상 장로가 되어서는 부지부식 간에 저의 말과 행동으로 상처 받는 이가 없도록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가 신앙생활을 잘해 줄 때가 가장 기쁘다. 우리 자녀들이 신앙생활 좀 더 열심히 해 주기를 바란다. 특히 주일만 되면 섬기는 간석교회에서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양가 사돈을 다 만나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