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회 총회에서 총회신학부는 수임안건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회의가 너무 빨리 진행되었기에 제대로 살펴 볼 시간도 없었다. 또 이 중요한 안건이 전국 총대들의 손에만 남겨져서는 안 되고 전국교회로 알리기 위해 준비했다.
제103회 총회신학부 부장 서창수 목사가 보고하고 있다
∎ 사순절 용어 사용금지 총회결의 재확인 및 사순절 교독문 사용금지
청원 취지는 “로마 카톨릭의 경절이자 종교개헉자들이 없앤 사순절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퍼져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사순절 용어 사용금지를 결의한 것을 확인 과 더불어 21세기 찬송가에 첨가된 사순절 교독문을 “찬송가 제작 시 삭제”할 것을 함께 청원하였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고난주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사순절 용어 사용 확산의 배경
예배갱신운동과 교회력 복원은 근래 일부에서 사순절을 비롯한 교회력의 절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나기 시작한 예배갱신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가톨릭의 “예배복고운동”에서 시작된 예배 갱신운동은 초대교회의 예배 회복이라는 과제를 통해 개신교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문제는 문화적 흐름에 맞추려는 이 예배갱신운동을 계기로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교회력에 따른 절기와 행사나 축제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있다. 뿐 아니라 절기나 행사에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색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 전통을 되살리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특히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교단의 실천신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교회력과 축일을 폐지한 것을 마치 어린아이를 목욕물과 함께 내어다 버린 것인 듯 비유하기도 한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중세의 예전과 교회력과 예배의식을 버린 것이 예배의 통전성을 훼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도하에 중세의 전통을 다시 도입하여 예배를 활성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에 따라 한국교회에서도 예배가 변화하면서 여러 혼란을 불러왔기에 분명한 목회적 지침과 방향의 제시(신학부 보고 p495)가 시급한 상황이다.
이 사안의 검토에는 먼저 교회력의 역사적이며 신학적 의의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사순절에 대한 관심은 결국 교회력과 절기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보다 큰 움직임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순절 용어와 교독문이 성경적 규범을 따라서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살펴 바른 방향을 찾아야 한다. 예배를 비롯해 기독교가 문화의 흐름에 대해 무관심하고 도외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문화에 적응하려는 경향도 마찬가지 위험이 있다. 이러한 극단을 오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예배에 관한 성경적이며 신학적 원리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 교회력 (Ecclesiastical Calendar/ Church Year)과 기독교 절기
교회력이란 단순히 말하자면 교회의 절기 또는 기독교 절기를 명시한 달력을 뜻하기에 “기독교 절기”나 “교회 절기”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한다. 그에 관한 언급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교회력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와 그의 역사를 일 년의 계절적 변화에 결부시켜 예배와 축제를 제도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력은 “구속 역사를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신학적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절기들은 성경의 진리를 행사와 의식을 통해서 가시화시켜 체계적이며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개신교에서도 일부 받아 들여왔다. 교회력를 훨씬 체계적으로 짜여져 지키는 가톨릭의 경우는 절기가 훨씬 많다.
교회력은 4세기 이후 교회가 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화된 다음에 체계화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자유화되면서 급속도로 확장되며 이교도들이 대거유입 되기 시작한 것도 교회력의 형성에 또 다른 요소였다. 교회력의 여러 절기들이 이교적 관습과 절기들과 연관되어 형성된 것을 추정할 수 있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교회는 이교의 축제들을 기독교 신앙의 절기들에 흡수하기 시작하였다. 일종의 토착화이며 상황화라고도 할 수 있다.
교회력은 구원의 언약과 성취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통해 “기독교 복음의 특성”을 드러내는 유익이 있다. 절기는 1년을 주기로 하여 구원의 역사를 되새기며 소망의 안목을 열어 믿음을 강화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력은 “단순히 반복되는 경축과 금식의 연례적인 행사 이상”의 의미가 있다. 특히 교회가 구원의 진리를 절기에 따라 공동체로서 함께 축하하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 또는 국가의 기념일을 경축하는 것 이상의 큰 영적 의미를 가진다.
물론 절기에만 영적 축복이 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절기를 특정한 구속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를 삼는 것은 유익하다. 교회력 자체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여러 세기에 걸쳐 서서히 발전”한 것일 수 있다. 이는 “시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신 일을 기념하며 그 의미를 교회 공동체가 되새기는데 그 목적이 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도 루터를 포함한 보수적인 개혁자들은 교회력을 보존하려 했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보증되지 않은 축전만은 제거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력이 점차 미신화되었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자들은 2,000명에 달하는 성자들의 축일로 넘쳐나는 교회력을 단순화시켰다. 종교개혁자들은 교리와 의식과 교회 정치만 개혁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력도 성경 진리에 입각해 그리스도 중심적인 절기를 회복시켰던 것이다(P496. 제103회 총회 보고서 부활절, 고난(성)주간(the Holy Week)과 사순절 (四旬節 Lent).
교회 절기를 체계화한 교회력의 근간은 기독교 절기의 핵인 부활절에 있다. 교회력의 출발점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근원이 되는 부활 사건이다. 부활의 경축은 주일의 기원일 뿐 아니라 모든 교회 절기의 기원이다. 초기 기독교는 고난과 부활을 구분하지 않고 기념했다. 그것이 파스카(Pascha) 절기이다. 이는 본래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함께 기념하는 절기였다.
사순절은 부활절 40일전에 오는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거나 바르며 죄를 통회하는 성회수요일(Ash Wednesday)에서 시작하여 6주간 금식, 절제, 회개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한다. 오늘날 지켜지는 사순절 Lent는 7세기 말이나 8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사순절의 절정은 “고난주간 또는 성주간 Holy week”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행해지던 성지순례에서 고난주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재현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종려주일과 세족 목요일, 성금요일과 부활절을 차례로 기념하는 예전 행사를 시행했던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오늘날 유럽이나 남미에서 매년 2월 중순이나 하순에 벌어지는 요란한 세속적축제인 사육제(謝肉祭)가 사순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순절이 시작되기 앞서 마음껏 먹고 놀자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사육제의 원어인 카니발(carnival)은 고기(carne)를 금한 다(levare)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명절을 지킬” 때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전5:8). 왜냐하면 기독교의 절기는 이교도의 만취와 부도덕의 난장판으로 타락해 버리는 축제와는 달리 거룩한 특색을 띠어야 한다.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의 제84회 총회는 사순절이 성경적 근거가 없는 가톨릭의 문화적 유산임과 그것의 실질적인 폐해를 들어서 철폐할 것을 결정한 바 있다. 이 결정에는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사순절이 미신적으로 시행되고 공로를 세우며 금식이 하나님께 예배가 된다고 주장하고 실행”했기에 폐지한 것을 중요한 근거로 삼았다. 특히 마음의 변화 없는 금식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도 아니며 혐오스러운 위선이며 이를 의무처럼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총회는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 성도들의 건덕을 위해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판단했다. 특히 6주간에 걸친 긴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채택해 지키면서 고기를 금하고 철야를 하는 관습은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렵고 이로 인해 양심의 “심히 괴로움”을 당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또 그로 인한 정상적인 생활의 지장이 초래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절기 자체가 형식화될 것도 또 다른 우려 요소이다. 특히 일단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받아들일 경우 다른 로마교회의 경절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성경적 예배 원리와 고난주간의 바른 기념
한국교회는 대체로 사순절 전체가 아니라 부활주일 앞 한주를 고난주간으로 기념해왔다. 결국 사순절 용어와 교회력 절기의 문제는 예배의 성경적 원리에 입각하여 판단해야 한다. 예배의 원리를 성경 이외에서 찾을 수는 없다. 이에 관한 성경 연구는 교회 역사의 교훈, 교의적 고려와 사회와 문화의 필요에 대한 목회적 판단 보다 훨씬 중요하다. 성경이 모든 시대와 문화에 획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예전은 아니더라도 예배의 원리를 계시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행하신 구원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예배"이다(신학부 보고 P497). 기독교는 신비적이며 명상적인 종교들과 달리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한 일들의 의미를 중시한다. 기독교의 예배는 자연의 절기를 따라 하는 경축 행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기념하는 일이 중심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재현하고 그 의미를 기념한다.
초대교회로부터 예배
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는 말씀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성찬으로 되어진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예배는 “무역사적인 신비적” 경험을 본질로 하는 이교의 예배와 아주 다른 모습이다. 교회력과 절기의 도입도 바로 이런 역사적 차원을 보다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력과 절기의 제도적 장치들이 과연 하나님과의 만남의 적절한 수단인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심령으로 삶을 돌아보며 죄를 겸손히 회개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특히 죄로 인해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의 고난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신 것을 기억하는 주간이 돼야 한다.
개혁주의의 특성은 의식적이기 보다 의미를 살려 일상의 예배로 나가는 것이다. 사순절 뿐 아니라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을 모두 경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회력은 중세이후 이교화와 미신화의 오염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를 바로 잡은 것은 바른 성경적 전통을 세운 것이다. 전통을 되살린다고 잘못된 관습을 다시 도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교회력과 절기의 복원에 대한 또 다른 중대한 우려도 있다. 그것은 상업화의 힘이 교회절기를 세속화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절기의 이교화나 미신화 뿐 아니라 “소비자 문화”에 굴복하는 위험도 경계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신 색깔 달걀과 초콜렛 토끼가 주인공이된 부활절과 산타클로스와 선물이 구주 탄생을 대신하고 있으며 이른바 “성 발렌타인데이”처럼 아예 연인들의 날이요 초콜렛과 캔디를 주고받는 관습으로 세속화된 경우도 있다. 여기에 또 다시 교회력을 바탕으로 사순절을 비롯한 교회절기들이 제도화될 경우 또 다시 비성경적일 뿐아니라 상업화의 오염도 심화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결 론
사순절 문제에 관하여는 이미 본 교단 84회 총회가 사순절 용어 사용금지를 결의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고난주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20세기 후반 가톨릭의 영향으로 일어난 “예배갱신운동”의 영향이 큰 것으로 사료된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사순절 용어 사용금지 총회결의 재확인 및 사순절 교독문 사용금지”에 관한 청원을 한 것은 시의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청원은 제84회 총회 신학위원회의 연구결과를 다시금 확인하고자 하는 목회적 우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사순절을 비롯하여 교회의 절기를 규정한 교회력은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4세기 이후에 비로소 제정되어 중세를 거쳐 체계화되었다. 교회력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일년 주기로 재연하는 예배와 축제적 관습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뒤섞이면서 이교화되고 미신화되는 폐단이 싹텄던 것이 사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사순절 뿐 아니라 교회력 자체를 철폐한 것은 그것이 비성경적이며 이교적 요소와 미신화로 인한 폐단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순절 문제는 역사적 교훈과 오늘날 문화적 경향을 고려할 때, 84회 총회의 결의를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된다(P498제103회 총회 보고서). 끝으로 사순절 용어 사용을 금지할 경우 자연히 21세기 찬송가의 개편 시 첨가된 사순절 교독문을 “찬송가 제작 시 사용하지”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2) 교회절기 바로 지키기: “맥추감사절(오순절) 대신 성령강림절”을 지킴 제안에 관한 연구 보고
본 연구는 남광주노회가 맥추감사절(오순절)이 “세상의 풍어제나 풍년제”와 같이 “단순한 감사 절기”로 변질되는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바로 지키기 위한 방향을 헌의한 내용에 따른 것이다. 해당 노회는 모든 교회 절기의 본래적 의미가 “구속을 감사하고 동참하는” 것이므로 “유월절 대신 부활절”을 지키는 것처럼 맥추감사절(오순절)도 단순한 세상적 감사가 아니라 성령강림절로 바꾸어 “총회 산하 모든 교회가 지킬 수 있도록 총회에서 결의”해주기를 청원한 건이며 이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02회기 신학부의 위탁을 받아 연구 검토한 결과의 보고서임.
맥추절(麥湫 感謝節, Feast of Harvest): 구약의 추수감사절
맥추절은 글자 그대로 보리와 밀의 추수를 감사하는 구약성경의 절기이다. 추수감사제는 어느 농경사회에나 있다. 하지만 맥추절은 단순한 농경문화의 일종이 아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들이 그렇듯이 맥추절 역시 구원의 복음 진리를 예표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맥추절은 출23:14-19, 34:18-26, 신16:1-17에 유월절, 초막절과 함께 반드시 지켜야 할 3대 절기로 명시되어 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것이다. 초막절은 광야생활을 잊지 않게 하는 절기이다. 맥추절의 의미는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신26:3-10)라는 기도에 잘 나타난다. 거기엔 출애굽에서 시작된 구원 역사의 성취됨을 감사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절기가 출애굽 직후 아직 광야생활을 하던 시점에 제정된 점도 특별하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아직도 멀고 먼 시점이다. 하지만 절기의 규례는 그 땅에서 추수한 곡식을 앞에 둔것처럼 자세하고 생생하다. 레23:9-22, 31, 민28:26-31에는 처음 낫을 대어 베어낸 곡식단과 알곡을 빻아 빚은 떡을 흔들어 제사하는 요제와 짐승을 번제로 드릴 상세한 지침이 제시된다. 성경의 절기는 언약을 따라 믿음으로 지키는 것에 근본적 뜻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맥추절은 칠칠절, 초실절, 오순절 등 다양한 이름과 여러 의미를 가진 것도 독특하다. 칠칠절은 유월절 직후에 거둔 보리 단을 드리는 초실절(출34:22, 민28:26)로부터 7주간이 지나 추수를 감사하는 것에서 나온 명칭이다. 유대에선 보리 추수가 이르면 4월에 시작되지만 지역에 따라 6월 초까지 계속되기도 한다. 여기서 “여러 주간(weeks)의 축제”라는 뜻의 셔브오트(Shavuot)가 유래했다. 한편 유대인들 사이에선 셔브오트가 추수의 감사뿐 아니라 옛 이스라엘백성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위해 준비했던 7주간으로도 기억되어 지켜지고 있다.
맥추절의 예표적 의미
구약의 모든 절기가 그렇듯이 맥추절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예표적 의미가 담겨있다. 맥추절의 의미는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유월절 직후 거두어들인 첫 추수로부터 7주를 지나 절정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맥추절의 과정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직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과 40일간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승천하신 후, 부활 7주째되는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는 과정을 상세히 예표하고 있다(신학부 보고 P499). 맥추절의 예표적 면모는 매우 치밀하다. 특히 보리와 밀의 풍성한 수확은 부활의 첫 열매에 이어 성령강림으로 3000명의 회심으로 교회가 탄생하고 복음의 추수가 일어날 것의 예고이다. 추수로 육신의 양식이 풍성해지듯이 오순절에 영적 추수가 시작되어 교회가 탄생하고 거기엔 성령 열매와 은사가 넘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날은 그렇게 시작된 구속의 역사가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을 통해 완성될 것에 대한 전망이기도 하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맥추절을 율법의 전수와 연관 짓는 것조차도 의미가 있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토대이며 정체성의 근거였다. 출애굽으로 해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음으로써 그의 백성으로 태어났다. 마찬가지로 오순절엔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가 성령을 받아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루었다. 심지어는 맥추절 제사로 바치는 두 덩어리의 유교병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예표라는 해석도 바로 이런 배경속에서 설득력을 얻는다(레 23:15-17, 엡2:14-15).
맥추절의 영적 교훈
역대기에는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마친 후 무교절과 초막절과 함께 맥추절을 지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대하8:12-14) 맥추절은 중세에 추수감사절로 이어졌다. 승천일에 앞선 풍년 기원제나 영국에서 8월 1일에 드리던 감사제와 청교도의 추수감사절도 그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유월절로부터 50일째되는 날, 추수 감사와 율법 전수를 축하하는 셔브오트
라는 축제를 연다. 이 때 집과 회당을 꽃과 푸른 잎으로 장식하며 모세5경 강론회를 밤새 열기도 한다. 꽃 장식은 율법으로 인해 사막이 꽃과 푸른 잎새로 바뀌는 것을 상징한다. 치즈 케이크과 같은 유제품을 먹는 관습도 율법이 우유와 비유되어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의 관습이 엄밀하게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준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더구나 농경사회를 거의 벗어나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쳐 이제는 인공지능시대를 향하며 전국이 심지어는 급속히 도시화된 오늘날 한국의 상황 속에서 한여름에 (보리)추수 감사의 의미를 과거 농경사회 때와 동일한 마음으로 새기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한 해의 상, 하반기로 나누어지는 시점에 지난 감사와 나머지 반년도 지켜주실 것을 소망하는 의미로 맥추감사절을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조금 부정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나 삶은 잃어버리고 맥추감사헌금을 내는 것만으로 맥추절을 기념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본래 맥추절은 “성회”이자 축제이며 감사가 넘치는 날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이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를 축하하는 날엔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한가지가 있다. 풍요 속에 소외되기 쉬운 사회적 약자를 잊지 말 것을 명하신 부분이다. 이는 추수 때 모퉁이를 남겨두고 떨어진 이삭은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해 줍지 말라는 명령에서 드러난다(레23: 22). 유대인들은 셔브오트에 룻기를 강론함으로 이 정신을 기린다. 신16:11-12은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잔치하라 명한다. 물질적 풍요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일을 힘쓸 뿐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복음의 풍성한 영적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것이 오늘날 맥추절을 축하하는 중심이어야 한다(P500. 103회 총회 보고서).
교회절기와 교회력
교회력은 영어로는 Litergical year 또는 Christian Year 그리고 Calendar 등으로 불린다. 교회력이란 단순히 말하자면 교회의 절기 또는 기독교 절기를 명시한 달력을 뜻한다. 그에 관
한 언급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교회의 절기는 구약성경의 유대교적 절기인 유월절과 연결된 부활절과 주일을 지키는 관습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력이란 교회가 세상과 다른 별개의 달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1년을 주기로 하여 지키는 여러 절기들(annual festivals)의 목록를 규정한 것이므로 “기독교 절기”나 “교회 절기”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교회력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와 그의 역사를 일년의 계절적 변화에 결부시켜 특별한 예배와 축제를 제도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력은 “구속 역사를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신학적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이 설교 뿐 아니라 절기 행사를 통해서도 선포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절기들은 성경의 진리를 행사와 의식을 통해서 가시화시켜 체계적이며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근래에 개신교에서도 일부 받아 들여왔다. 교단들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강절, 성탄절, 현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왕국절 등 7개 절기를 지정했다. 창조절, 주현절, 승천일,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절, 그리고 종교개혁절 등이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교회력를 훨씬 체계적으로 짜여 지키는 가톨릭의 경우는 절기가 훨씬 많아서 사실상 거의 매 주일이 그리스도와 관련된 절기들(Temporal Cycle)과 성인들의 축일 (Sanctoral Cycle)로 지정되어 있다.
맥추절은 구약성경의 대표적 감사의 절기이다. 신약성경에 맥추절은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교회를 태동하게 한 오순절 사건으로 인해 진정한 의미의 구속 언약의 성취이자 영적 추수라는 의미로 더욱 풍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령강림절로 오순절을 지키도록 한 중세 이후의 절기들과 교회력은 성경적 근거가 미약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서 교회력은 4세기 이후에 비로서 제정되어 중세를 거쳐 체계화되었다. 교회력은 구원 역사를 일년 주기로 재연하는 예배와 축제적 관습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선교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절기와 관습들과 혼합이 되면서 이교화되고 미신화되는 폐단이 싹텄다. 특히 중세에 마리아 숭배나 성인들의 축제로 확장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절기를 대폭 간소화하거나 비성경적인 부분을 개혁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사순절의 폐지 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는데 이교적 요소와 미신화로 인한 폐단이 그 이유였다.
맥추절과 교회절기 바로지키기
금번 남광주노회의 헌의도 맥추감사절(오순절)을 축하하는 방식을 세상적인 추수감사제가 아닌 “구속을 감사하고 동참하는” 거룩한 절기로 지키는 방안의 하나로 대신 성령강림절을 지킬 것을 제안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맥추감사절(오순절)은 우리나라의 계절적 절기 축하에 있어서나 특히 현대적 삶 속에서의 문화적 의미를 찾기에는 어려워 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남광주노회가 맥추감사절(오순절)을 지키는 대신 성령강림주일을 지키는 방안을 찾아보게 함으로써 교회절기를 복음의 핵심인 구속사건의 축하로 바꾸는 것으로 총회에 헌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신학부 보고 P501).
그런데 문제는 이미 많은 한국교회들이 일년의 절반을 지내며 감사와 나머지 반을 소망으로 바라보는 기회로 삼는 맥추감사절을 어떻게 혼란이나 반대 없이 성령강림절 축하로 바꾸어 갈 것이냐 하는 점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지금까지 지켜온 것 같이 상반기 하나님의 은혜에 주심에 감사하는 맥추감사주일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명목상으로 단순하게 맥추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감사절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절기를 지키면서 동시에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구속 언약의 진정한 추수인 복음전도를 강조하는 쪽으로 성령강림절을 강조해서 지켜 나가는 것이다. 한국교회 달력을 보면 거의 매년마다 부활주일부터 50일되는 주일을 성령강림주일로 기록하고 있다. 왜 부활주일부터 50일되는 날을 성령강림주일로 달력에 기록되었는지 아는 것은 교회절기력에 특별한 관심을 갖은 소수의 목회자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거의 알지 못한다. 맥추절과 함께 쓰인 오순절(五旬節, Pentecoste)은 로 '제50'의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다. 오순절은 본래 보리농사의 수확을 끝내고 밀을 바치는 절기를 말하며, 逾越節 이튿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해당한다. 이 날,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그의 제자들이 모인 곳에 (聖靈)이 강림하자(<사도행전> 제2장), 그들은 성령에 충만하게 되어 전도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므로 이 날을 '성령강림일'이라고도 본 것이다. 문제는 부활절 이후 순차적으로 50일되는 날을 성령강림절로 지킬 것인가? 아니면 맥추절의 풍성한 의미로서의 성령강림절을 지킬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결 론
현재 대다수 한국교회, 특히 우리 교단에는 부활절로부터 50일째 되는 성령강림절을 제대로 지키고 강조하는 교회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므로 제안할 수 있는 것은 현행대로 달력에 기록된 바에 따라 성령강림절을 지키되 그 의미를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과 같이 강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제안은 지금 대다수 교회들이 하고 있는 대로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성령강림주일을 동시에 지킴을 통해 그 의미를 확대하고 심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 해의 반절에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맥추절의 의미도 보전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출발점이 된 성령강림의 구속사적 의미도 새김으로써 영육간에 감사하고 성령 안에서 능력을 체험하며 더욱더 하나님께 감사의 삶을 강조하는 주일로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간 한국교회는 맥추감사절은 매우 강조했으나 성령강림절은 많이 강조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남광주노회가 헌의한 내용은 충분히 검토하여 실천해야 할 이유가 있다. 특히 근래에 들어 예배갱신운동을 비롯하여 중세에 시작된 카톨릭적 교회력 전통을 다시금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에 대해 엄밀한 반성과 개혁주의적 실천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금 번 총회를 앞두고 대구노회가 “사순절 용어 사용금지 총회결의 재확인 및 사순절 교독문 사용금지”에 관한 청원을 한 바 있으므로 이 헌의안과 연계하여 교회력과 절기 전반에 대한 총회적 가이드라인의 설정을 깊이 연구하고 심각히 논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 어린이 세례 건(시행세칙, 교육, 문답자료)-어린이 세례의 당위성과 유익
6세에서 13세까지의 어린이는 성인과 유아의 중간의 위치에 놓여 있다. 필자의 판단으로 어린이 세례는 성인 세례의 신앙적 의의와 유익 그리고 유아 세례의 신학적 당위성과 유익이 동시에 적용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일반적 특징에 비추어 볼 때도 어린이 세례는 필요하고 유익하다(P502. WP103회 총회 보고서).
성인 세례의 의의와 유익에 관점에서 본 어린이 세례
(1)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6-13세의 어린이는 성인들과 같이 인지적인 면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고 믿음 안에서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신앙을 고백한다면 성인들과 같이 그 신앙에 근거해서 세례를 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2) 세례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공적인 신앙고백이다. 어린이들도 세례를 통해 교회 공동체의 일원되는 공적인 신앙고백을 함으로 공동체 의식과 지체 의식 그리고 소속감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게 할 수 있다. 공동체 의식, 지체 의식 그리고 소속감이 어린이들에게 신앙적으로 정서적으로 많은 유익이 됨은 명약관화하다.
(3) 은혜의 수단인 성례 예식의 복도 누릴 수 있다. 세례 예식의 과정에서 어린이들도 회개와 결단의 시간을 갖게 됨으로 죄 씻음(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은혜와 성령의 충만을 체험할 수 있다.
(4) 어린이들도 세례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로 살고자 결단과 각오를 늘 새롭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세례 예식은 어린이들이 신앙생활의 새로운 삶을 위한 출발점 또는 결단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수세자로서의 인식은 평생토록 그들의 신앙과 삶에 유익하다.
유아 세례의 적용과 유익의 관점에서 본 어린이 세례
(1) 어린이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부모 또는 후 견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린이 세례는 부모 또는 후견인들에게 자녀(아동)들의 신앙 교육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을 느끼게 하고 최선을 다해 신앙 안에서 교육하고자 하는 결단과 각오를 다지게 한다.
(2) 어린이 세례는 어린이들에게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게 한다. 또한 이로 인해 어린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어떻게 경건하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분명한 의식을 갖게 되며, 교회 안에서도 온전한 예배와 섬김에 힘쓰게 될 것이다.
(3) 어린이 세례를 시행함으로 교회는 어린이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어린이 세례를 통해 교회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린이들의 신앙과 삶에 더욱 더 큰 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그들이 성숙하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도록 더욱 더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어린이의 일반적 특징의 관점에서 본 어린이 세례의 필요와 유익
(1) 무엇보다도 발달심리학적인 면에서 어린이들은 인생의 어느 때보다 새로운 것을 가장 잘 받아 들이는 특성이 있다. 다시 말해, 어린이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가장 열려있는 밭이며, 신앙의 성장을 급격하게 이룰 수 있는 시기이다. 그 시기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때이다. 어린이 사역에 오랫동안 헌신해 온 양승헌은 어린 시절 받아들인 복음은 아이의 한 평생의 나무꼴을 아름답게 만들고, 어린 시절 예수님을 만난 아이는 사춘기를 비롯한 숱한 타락과 유혹의 위기를 힘차게 극복해 나간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잠언 22:6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세례 예식을 매개로하여 그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고 돌보는 것은 그들의 평생 신앙과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2) 어린이들은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구체적인 예와 경험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교육되어지는 특성이 있다. 다시 말해, 어린이는 어른처럼 인지 능력이 발달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적인 또는 영적인 개념들을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진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 어린이들에게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라”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또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등의 신앙의 진리를 그냥 말로 설명하기 보다는 상징적인 것들을 통해 보여주며 경험케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린이의 특징을 고려할 때, 세례 예식을 통해 신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경험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탁월한 교육 방법이 될 수 있다.
(3) 어린이들은 당연히 어른들에 비해 미성숙하고 안정감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 어린이들은 성인보다 쉽게 삐치고, 쉽게 웃고, 쉽게 실망하고, 쉽게 기대감에 부풀고, 쉽게 좌절하고, 쉽게 회복되는 특징이 있다. 또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쉽게 열등감을 느끼며 정서적으로 불안정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에베소서 4:14에서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다(참고. 신 1:39: 고전 13:11). 이러한 시기에 세례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자존감을 세워주고, 정체성과 소속감을 확립시켜 주는 것은 이들이 자라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전체 인생과 삶에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어린이들도 인지적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고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막연한 전통이나 선입견 때문에 또는 시행에 있어서 불편하고 번잡함 때문에 어린이 세례를 실시하지 않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또한 세례(특히 유아 세례)의 유익을 인정한다면 어린이 세례를 실시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 특별히 어린이의 시기에 세례 예식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은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도 풍성하고 탁월하다. 당사자 뿐 아니라 부모와 교회 전체 공동체에도 어린이 세례 시행이 주는 도전과 유익이 많다.
결론(제언). 어린이 세례 시행을 위한 제언(시행세칙)
위에서 우리는 어린이 세례의 당위성과 유익을 살펴보았다. 이를 기초로 필자는 어린이 세례시행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1) 연령 조정: 모든 세대 세례 시행을 위해서 연령 조정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외국 교회와 기독교대한감리교와 같이 유아 세례를 0-6세, 어린이 세례를 7-13세, 성인 세례 14세 이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2) 신앙 고백: 유아 세례와는 달리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믿음 안에서 신앙 고백을 하는 자에게 어린이 세례를 시행한다.
(3) 부모 또는 후견인의 동의와 서약: 어린이는 아직 신앙적, 정신적, 인격적, 정서적으로 도움과 지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믿음의 부모 또는 후견인(부모가 믿지 않을 경우에 해당한다. 당회도 후견인이 될 수 있다)의 동의와 서약이 필요하다.
(4) 입교인의 자격: 유아 세례자와 마찬가지로 만 14세 이상이 되면 입교 문답을 통해 입교인의 자격을 부여하고 성찬에 참여하게 한다(P504. 제103회 총회 보고서).
(5) 세례 전과 후의 교육
(a) 세례 전 교육: 부모 또는 후견인을 동반하여 최소 3개월 동안 교리, 복음, 신앙생활, 학교생활 등의 교육을 실시한다. 교육과 훈련의 마지막 과정으로 1박 2일의 캠프 등을 실시하는 것도 권장한다.
(b) 세례 후 교육: 매년 정기적으로 세례자의 신앙과 삶을 점검하고 새롭게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 기독교 세계관, 교회생활 그리고 학교생활에 대한 실제적인 교육 등을 실시한다. 이 때 유아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도 참여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교육을 위해 세례 받기 전에 서약하도록 하며, 입교에도 반영하도록 한다.
(6) 의미 있는 세례식의 거행: 초대 교회가 했던 것처럼 할 수 있다면 수세자와 부모(후견인)에게 하루 정도의 금식을 하도록 권면하고, 세례 당일에는 순결함의 상징인 흰 옷을 입고 세례를 받도록 함으로 세례 예식에 의미를 부여하고 오래 기억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전체 공동체 예배 가운데 세례 예식을 시행함으로 당사자 뿐 아니라 전체 교회가 함께 책임과 의무를 공유하도록 한다.
∎ 표준예식서 장례식 ‘고별기도’ 를 현대용어로의 개정의 건
현재 우리 교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준 예식서에는 잘 사용하지 않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어나 고어들 그리고 신학적으로 고려해야 할 용어들이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수정하기를 제안한다.
* 신조
동포요, 형제이다. → 형제요 자매이다. 6(p. 13). 아담으로부터 보통 생육법에 의하여 → 창조질서에 의하여 아담으로부터 자연적으로. 9(p. 15). 하나님의 아들의 수(數)에 참여하게 하심과 →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과. 11(p. 16) 법례 → 교회가 정한 규례. 순복 → 순종.
목사 임직식
1. 동심협력하기로 맹세합니까? → 한마음으로 협력하기로
2. 본심에서 발생한 줄로 자인합니까? → 마음 깊은 곳에서 비롯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3. 교회의 성결과 화평을 힘써 도모하고 근실히 역사하기로 작정합니까? → 교회의 성결과 화평을 힘써 지키고 근면(성실)하게 섬기기를 결심합니까?
목사 위임식, 교인의 서약
1. 치리를 복종하기로 승낙합니까? → 치리에 복종하기로
2. 의수히 지급하여 → 일정하게 정한대로 지급하여
장로 임직식
1. 심령육비에 아로새겨 명심불망 실천하여 → 마음 깊은 곳에 새겨 결코 잊지 않고 실천하여
입관식
번다한 허례 → 번잡한 허례
장례식
고별 기도 → 환송 기도. 배례하는 일은 금한다 → 절하여 예를 표하는 일은 금한다.
∎ GMS 파송 여성 선교사 세례집례 허용 건
본 연구 논문에서 다루는 주요 주제는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성경적인 여성교회지도력과 그에 따른 여성선교사의 성례권 문제이다. 구미 교회들은 이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 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논쟁이 있어왔고, 여성선교사의 목회지도력과 성례권 문제가 나름대로 정리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경의 권위를 믿고, 성경적인 신학과 신앙을 가진 대다수의 보수 교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확고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다만 근래에 와서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 교회 진영 안에서 존 칼뱅의 여성관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고, 전통적인 여성의 지도력과 연관된 성경구절들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학문적인 시도는 보수적인 한국교회 안에서도 이미 시작이 되었고, 한국 제일의 장자교단이라 할 수 있는 보수적인 합동 교단 안에서도 이미 일어나고 있다. 본 연구자는 교단의 위임을 받아서 이 주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교단의 전통적인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과 신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정리하려고 시도하였다. 본 연구자는 오래전에 교회지도력의 관점에서 여성의 선교사 직책과 목사안수를 서로 연관하여 연구하였다. 그때의 연구결과가 이 연구논문에 거의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왜냐하면 원리적인 측면의 연구이었기에 오늘 날 연구되어지는 내용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21세기 선교현장을 염두에 두고, 여성선교사의 성례권 문제를 목사안수와 연결 짓지 않고, 즉 여성의 목회지도력과 상관없이 어떻게 신학적으로 실천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겠는가의 고민이 있다. 본 연구자는 이 문제에 대한 실제적인 제안을 이 소논문에서 하고 있다. 이러한 제안은 상황에 성경을 맞추려는 시도는 절대 아니다. 즉 상황이 성경적 원리를 손상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해결점을 최선을 다해서 찾아보려는 선교학적인 시도인 것이다.
우선적으로 여성의 교회지도력과 연관된 전통적인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의 성경해석의 세 가지 근본 원리들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구미 교회의 보수적인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성경해석의 세 가지 원리이다. 그것은 계시의존 신학의 원리와 대표의 원리 그리고 창조질서의 원리이다. 간단하지만 결코 간단한 내용은 아니다. 본 연구자는 계시의존 신학의 원리, 대표의 원리 그리고 창조질서의 원리가 무엇이며, 이런 원리들을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성경계시의 통일성 측면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성경을 해석하는데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학자들의 연구 활동과 성경해석의 실제적인 시례들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런 원리들이 여성의 목사안수 문제를 이해하는데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려 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여성의 교회지도력과 연관하여 끊임없이 신학적이고, 성경해석학적인 논쟁이 되고 있는 관련 성경구절들과 문맥들을 구체적으로 교회직분과 연관하여 목사, 장로, 집사, 전도자, 선교사 등으로 구분하여 신학자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신학이론을 전개시켜 나가는지 그 구체적인 실례들을 세 가지 차원에서 연구하였다. 첫 번째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소위 성경 비평학의 모든 이론들을 거리낌 없이 활용하고 있는 일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경해석과 이론이다. 이분들의 공통된 신학적 입장은 남성과 여성의 성별 평등성과 교회직분의 평등성이다.
두 번째는 복음주의 진영 안에 있으면서 복음주의 신학의 신앙유산과 신학을 따른 다는 기본 명제 하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적 평등성을 강조하는 일군의 신학자들이다. 이분들은 관련 성경구절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부분적으로 지평의 융합을 주장하는 가디머의 상황적이며 문화적인 접근과 문서비평과 편집자비평의 제한된 도입과 그에 따른 성경해석과 이론 등이다. 이런 신학적 접근을 하는 일군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본인들의 연구결과에 의거 하여 여성의 목사안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세 번째는 서론에서 이미 언급한 전통적인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자들의 성경해석의 원리로서 계시의존 신학의 원리와 대표의 원리 그리고 창조질서의 원리들을 그대로 이들 논란이 되고 있는 성경구절들과 문맥들에 대하여 일관성 있게, 확실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번째 차원의 일군의 신학자들은 여성의 목사안수를 성경적이라고 보지 않고, 따라서 여성의 목사안수에 대하여 반대하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본 연구자는 이 세 차원에 속한 신학자들의 성경해석과 그에 따른 이론들을 대조적으로 서로 대비하여 나타내었다. 여기서 본 연구자의 신학적 입장은 확실하게 이미 연역법적으로 전제하였듯이 세 번째 차원의 영역에 속해 있고, 이 입장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청교도신학자들의 신학적 입장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여성선교사의 성례권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할까? 여기서 확실한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차원에 속한 일군의 신학자들의 목사안수와 연결 짓는 성례권 문제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 론
본 연구자는 이 문제를 선교현장과 연결하여 사역과 은사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여성선교사를 타문화권에서 복음전하는 특수 사역자로 이해하고, 이것이 성령의 은사에서 나온 특별한 직분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목사안수와 직접 연결 지을 수는 없지만 선교현장의 필요에 의하여 엄격한 규정 하에 성례권 문제를 제한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본 교단의 총회에서 3년 한시적으로 여성선교사에게 성례권을 선교지역의 특수 상황에 따라 허용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경계할 것은 일각에서 나오는 여성선교사에게 한시적으로 성례권을 허용하자는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서 여성의 교회직분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두 번째 유형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이다. 이런 입장은 궁극적으로 여성선교사의 목사안수와 직접 귀결된다. 여성선교사에게 성례권을 허용하는 것은 총회헌법에 반영할 필요는 없다. 총회헌법은 본 소논문에서 직접 인용하였지만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에 의한 목사안수를 남성에게만 자격을 부여한다. 이것은 개혁주의 교회의 오랜 전통적 입장이다. 다만 여성선교사를 목사로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타문화권 하에서 복음을 전인적으로 총체적으로 전하도록 부르신 사역자로서 성령의 은사로서 접근해야 한다. 소논문에서 자세히 논하였지만 남성 목사선교사가 들어가서 사역할 수 없는 특수 지역과 문화가 선교지역에 많이 있다. 이때는 여성선교사를 투입해야 한다, 여성선교사가 제자훈련 사역이나 교회개척 사역에 종사하게 될 때 성례권이 요청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 여성선교사의 기본 자질을 살피고, 남성 목사선교사가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인지를 현지 선교 지부장에게 확인하고, 현지 지부 목사선교사들의 확인과 동의하에 대신하여 일종의 대리인으로 성례권을 수여하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총회선교회의 여성선교사의 자격요건과 선교현장에서의 시행지침으로 얼마든지 규정할 수 있다. 여성선교사에게 성례권을 선교현장에서 자유롭게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성례권을 남성 목사선교사를 대신하여 혀용할 수 있는 그런 특수 상황인지가 확인되어야 한다. 이런 확인 절차를 거치게 될 때 몇 가지 규정을 만들어서 제한되게 자격이 있는 여성선교사에게 성례권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선교현장에 수 억 명의 복음을 들어야 하는 영혼들과 그들 중에 여성선교사의 사역의 결실로서 셰례를 받고, 거룩한 공교회의 일원이 되기 원하는 복음의 제자들이 있을 때 본 교단은 목사안수와 상관없이 타문화권 복음의 사역자로서 여성선교사에게 성례권을 허용하므로 자격 있는 여성선교사가 힘 있게 선교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 NCCK와 로마 가톨릭의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의 배교행위 규정과 로마 가톨릭을 이교로 지정하는 건
I.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에 대한 입장
본 논문은 201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2회 총회에서 결의한대로, 함평노회장 이상백 씨 외 2개 노회에서 헌의한 1) NCCK와 로마 가톨릭의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배교행위로 규정하고, 2) 로마 가톨릭을 이교로 지정하는 청원의 건은 “신학부로 보내 연구하여 보고토록 가결하다.”고 한 총회결의에 따른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한국정교회, NCCK, 그리고 NCCK 회원교단은 그리스도인 일치 증진을 위해 1986년 일치기도회를 시작으로 교류를 지속하였고, 2001년에는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을 조직해 매년 일치기도회, 일치포럼, 신학대화, 신학생 교류 등 일치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리고 2012년을 즈음하여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의 강화에 대한 공감이 일어났고, 같은 해 12월 교단대표 간담회는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연대의 틀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을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로 개편하기로 합의하고, 2014년에 창립총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로마 가톨릭교회(한국천주교회), 한국정교회가 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의 활성화와 일치 증진을 위해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창립하고, 2014년 5월 22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참석 교단은 한국천주교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외에, NCCK 회원교단인 한국정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한국루터회가 참여했다. NCCK는 때로 KNCC로 표기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24년 일제치하에서 장감선교연합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시작하였다. 해방 후 1946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로 재발족 되었고, 1948년 8월에는 화란의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이후 1961년에 국제선교협의회(IMC)와 WCC가 병합되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출발하게 되었다. 현재 NCCK는 WCC의 협력단체이며, WCC의 한국지부가 아니다. NCCK의 회원교단은 현재 9개이며, NCCK 산하에 대전NCC를 포함하여 전국에 9개 지역협의회가 있다.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위원회’의 모델을 따라 운영되고 있다.
NCCK가 주도하는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와 WCC의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서로 별개의 기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기관은 서로 개별적으로 움직이지만, 동시에 서로 연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지적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듯이 개신교(The Protestant Church)와 로마 가톨릭교회 및 정교회(희랍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와의 연합운동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로마 가톨릭교회(한국천주교회), 한국정교회가 그리스도인 일치운동의 활성화와 일치 증진을 위해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구성(2014년)한 것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와 WCC와의 관계는 1948년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화란의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제1차 창립총회로부터 시작한다. 창립총회에 당시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가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와 청년대표 엄요섭 목사, 감리교 대표로 변홍규 목사를 옵서버로 참석케 하였고, 김관식 목사의 귀국보고를 받고 장로교는 WCC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1954년 미국 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에는 한국의 장로교 대표로 명신홍 박사와 김현정 목사가 참석하였다. 1959년 통합총회가 분리된 후,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총회에는 기장측은 강원용 목사가 대표로 참석하고, 기장측이 정회원으로 가입하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은 제3차(1961년), 제4차 총회(1968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총회에는 한국대표로 김활란(이대 총장), 강원용(경동교회 목사), 길진경(NCCK 총무), 김길창(NCCK 회장), 박상증, 오재식(청년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지난 2013년 부산에서 열린 제10차 총회는 제3차 총회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 이어 두 번째로 아시아에서 열리는 총회였다. 당시 한국준비위원회의 면모를 보면, 상임고문으로 방지일, 림인식, 조용기, 김장환, 박형규, 강문규, 김성수, 신경하, 김명혁 등, 10명으로 되어 있고, 대표대회장으로는 김삼환, 집행위원장 김영주, 상임총무단으로 통합, 기감, 성공회, 구세군, 기하성, 복음, 루터교, 기성, 백석, 정교회, 외 5개 교단 총무 및 사무총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회원으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한국성공회 등 4개 교단이 WCC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회원으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성공회 외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구세군대한본영, 정교회한국대교구, 기독교한국루터회 등 9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다.
이러한 일치 추구의 경향을 타고, 1999년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에서는 “칭의의 교리 공동선언”(“The Joint Declaration of the Doctrine of the Justification”)을 통해, 칭의 문제에 관한 한 16세기에 있었던 상호정죄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였고, 2006년에는 세계감리교협의회 제19차 총회에서 이 문서에 서명하였으며, 2007년 한국에서 열린 감리교대회에서 감리교회가 동의하였으며, 이를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는 적극적으로 수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구원 얻는 도리를 선포한 종교개혁자들의 기치가 분명한데, 이제 와서 로마 가톨릭교회가 받아들인 칭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종교개혁의 원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비셩경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WCC와 관련하여서는, 1959년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문제로 인하여 총회장이 정회를 선언한 후(9월 28일), 연동측이 총회정회 후 속회(11월 23일)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탈(9월29일 속회)한 후, 정해진 날짜에 속회총회(11월 23일)에서,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NCCK가 주도한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과 직제협의회“에 대하여도 총회 결의대로 할 것이다. 그러므로 NCCK와 로마 가톨릭(한국천주교회), 한국정교회에서 시작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는, 우리 교회가 WCC를 배격하는 것과 동일하게, 본 총회의 신학사상과 맞지 않음으로 배격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된다.
II. 로마 가톨릭의 이교 지정에 대한 입장
로마 가톨릭의 이교 지정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최근 로마 가톨릭과 관련된 총회결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로마 가톨릭의 영세 문제와 관련하여, 2013년의 총회결의는 개종하기 전에 로마교회(천주교회)에서 받은 세례 및 아동세례를 인정하여 재세례를 하지 않기로 한것이다. 이 결의는 지금까지 총회산하 교회에서 관례대로 행해오던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때까지 로마 가톨릭의 영세에 대하여 지교회의 당회로 하여금 당사자의 영세 받을 당시 신앙고백을 확인하고 재세례의 찬반을 당회가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므로 2013년의 총회결의는 지금까지의 관행을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14년 총회의 결의는 정반대였다. 2014년 제99회 총회는 가톨릭 영세를 인정할 수 있는지 질의한 건에 대하여, “불가한 것으로 가결”했다.(「제99회 총회 회의록」, 99. 밑줄은 강조를 위한 필자의 것임) 동시에 NCCK와 가톨릭과 정교회 간에 합의한 ‘신앙과 직제일치를 위한 협의체’ 구성에 대하여도 “본 총회의 신학사상과 맞지 않음으로 반대한다”고 총회입장을 발표했다.(「제99회 총회 회의록」, 102)
그리고 2014년 제99회 총회에서 천주교 신자 영세 세례로 불허 결의에 대한 재결의를 청원한 동평양노회장 박상걸 씨 외 4개 노회의 헌의는, 2015년 제100회 총회에서 “제99회 총회결의대로 하다.”고 결의하였다.(「제100회 총회 회의록」, 92) 그리고 2016년 제101회 총회에서 이 문제의 일부가 다시 헌의되어 결의되었다. 가톨릭의 영세문제에 대하여 “제99회 총회결의를 준수하되, 소급적용을 금지해 달라는 청원”은 허락하기로 가결되었다.(「제101회 총회 회의록」,) 이로써 로마 가톨릭의 영세문제는 2014년 제99회 총회결의와 2015년 제100회 총회결의에 따라, “불가한 것으로” 가결되고, 단, 소급적용은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2014년과 2015년의 총회 결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2014년)까지 관행대로 해 당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던 방식을 넘어, 총회의 결의에 의해 로마 가톨릭의 영세에 대하여 불허할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는 총회산하 모든 교회에서 로마 가톨릭에서 개종한 사람에 대하여 재세례를 명하게 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2014년과 2015년의 총회 결의는 예장통합의 총회결의와 비교해볼 수 있다. 2017년 제102회 총회에 보고된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의 “로마(천주)교회의 영세에 관한 연구보고서”는 “로마(천주)교회의 영세를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된다.”고
보고했고, 예장통합 총회는 이 결론을 채택했다. 예장통합은 2004년 제89회 총회에서 로마 가톨릭의 영세와 관련하여, ‘영세를 받은 이들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지 않고 입교가 가능하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그리고 10년 후 2014년 제99회 총회에서 로마(천주)교회에 대한 이대위의 “이단적인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면서도 “로마교회가 반사회적이라거나 반윤리적인 다른 이단 집단과 같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우리와 다른 전통을 고수하는 교회로 보아야 할 것이다.”는 연구결론을 담은 “로마(천주)교회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통과시켰다. 이후 2004년의 “입교가 가능하다”는 결의와, 2014년의 “로마교회는 우리와 다른 전통을 고수하는 교회”라는 서로 상충하는 결의에 대하여 재론하기로 허락을 받아 작성된 2017년 제102회 예장통합 총회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의 “로마(천주)교회의 영세에 관한 연구보고서”의 결론을 받아들여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로마(천주)교회의 영세를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된다.”는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리하여 로마 가톨릭의 영세와 관련하여, 우리 총회는 2014년 제99회 총회에서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2015년 제100회 총회에서 “제99회 총회결의대로” 하기로 결의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102회 총회에 보고된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의 ‘로마(천주)교회의 영세에 관한 연구보고서’는 “로마(천주)교회의 영세를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된다.”고 보고했고, 예장통합 총회는 이 결론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우리 총회산하 교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천주)교회에서 받은 영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지만, 예장통합은 2017년 총회에서 로마 가톨릭(천주)교회에서 받은 영세를 인정하기로 했기 때문에, 이미 제89회 예장통합 총회(2004년)에서 영세를 받은 이들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지 않고 입교가 가능하다는 결의에 따라 세례를 다시 받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우리 총회와 예장통합 총회 사이에 입장차이가 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영세문제에 대한 입장은 다르지만, 일단 이 문제는 서로 정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실들을 숙지하고, 본고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서와 관련하여 로마 가톨릭에 대하여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인 신조(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에서 로마 가톨릭에 대한 부분들을 살펴보자. 교회 헌법의 부록에 위치한 「신도게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의 제목은 “교회에 관하여”이다.
제25장 5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5. 하늘 아래 가장 순결한 교회들이라도 혼잡과 오류에 빠지기 쉬우며, 또 심지어 어떤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회가 될 만큼 타락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지상에 항상 있게 될 것이다.”(밑줄은 강조를 위한 필자의 것임) 위의 제25장 5절에 언급된 밑줄 친 부분인 “사단의 회가 될 만큼타락”한 “어떤 교회들”에 대하여, 찰스 하지의 아들인 아들 하지(A. A. Hodge)는 그의 저서인 『신앙고백서 해설』에서, 당시 영국과 미국의 소시니안주의자들과 독일의 합리주의자들의 배교도 언급하고 있지만, 주로 이 구절을 “로마 교회”(“The Chruch of Rome”)와 관련하여 비판하고 있다. 우리 헌법에 실린 「신도게요」 제25장 6절은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 “죄악의 사람,” “불법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 또는 북장로교회)에서 1903년에 광범위하고 결정적인 개정작업이 있었는데 그때 25장 6절에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명한 것이 삭제된 것이다. 그리고 PCUSA(북장로교회)에서 분리된 OPC(정통장로교회, 1936년)와 PCUS(남장로교회)에서 분리된 PCA(미국장로교회, 1973년) 교단은 신앙고백서를 채택할 때, 1903년 개정 이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채택했다. 우리 총회의 「신도게요」는 OPC와 PCA 교단에서 받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원문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신도게요 25장 6절에서는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명한 내용이 삭제된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이 구절에 있어서 우리 총회는 OPC 와 PCA가 채택한 신앙고백서를 따르지 않았다. 이 구절에 대하여 우리 총회는 OPC 와 PCA가 채택한 신앙고백서를 따르지 않고, PCUSA(미합중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를 따르고 있다. 우리 총회 헌법의 신도게요 맨 뒤에 “이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역문은 내용을 미국 정통장로교회의 신도게요에 따라 최초 원본대로 취하고 각주는 주로 미국 남장로교회 신도게요에서 취함.”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우리 총회의 헌법에 실린 「신도게요」 제25장 6절은, 실제로는 1983년 미국의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가 합쳐서 새로 출발한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의 신앙고백서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현재 PCUSA의 교단 신학교는 프린스턴 신학교이며 NCC와 WCC의 회원교단이고, 여성임직과 동성연애자 임직을 시행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 6절에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명한 것과 관련해서는, 우리 총회의 신도게요는 PCUSA의 신앙고백서를 따라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명한 것은 삭제되었고, OPC와 PCA의 신앙고백서에서도 표현은 다르지만 이 내용이 삭제되어 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8장은 “세례에 관하여”라는 장이다. 2절에서 “이 성례에 사용될 외적 요품은 물이니 당사자는 그것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그 직에 부름 받은 복음의 교역자에 의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28장 2절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세례에 대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3가지를 말해주고 있다. 1) 세례는 물로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며, 2) 세례는 합법적인 복음의 교역자에 의해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7절에서 “세례의 성례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오직 한 번만 베풀 것이다.”고 명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을 이교로 지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 더 고려할 것이 있다. 우리 교회의 헌법에 실린 「IV. 정치」에는 정치 총론을 논하면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주후 1517년 신구 2대 분파로 나누어진 기독교는 다시 수다한 교파를 이룩하여 각각 자기들의 신경, 의식, 규칙, 정치 제도가 있어서 그 교훈과 지도하는 것이 다른 바 이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에 이어서 교황 정치, 감독 정치, 자유 정치, 조합 정치, 장로회 정치 등 5가지를 나열하고 각각 설명하고 있다. 우리 헌법의 정치 총론에서 우리 교회가 속한 신교(또는 신파)를 로마 가톨릭교회인 구교(또는 구파)와 구별하여 “신구 2대 분파로 나누어진 기독교”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헌법의 정치 총론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구교(또는 구파)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위의 논의된 논의들을 종합하여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결론을 내려야할 시점이다. 결론에 앞서 우리의 신앙고백서의 원문을 채용하고 있는 미국 OPC(정통장로교회)에서 택하고 있는 방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OPC는 교단의 홈페이지에 개설된 “질문과 답변”란에 실린 “타 교단에서 받은 세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아래와 같이 대답하고 있다: “It is generally the practice of the OPC to accept Roman Catholic baptism as fulfilling the requirement for baptism. The reasoning behind this practice is that the sanctity of the ordinance does not depend on the character of the person performing the baptism.” 위의 답변에 따르면, OPC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세(세례)를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시행하는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가르친 대로, 이 예식의 거룩함이 세례를 베푸는 사람의 성격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에 있다고 하였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칼빈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세례의 성례가 베푸는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부터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그 집례자로 말미암아 그 존엄성이 더해지거나 상실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목사의 존엄성으로 말미암아 성례의 유효성과 가치를 매겼던 분리주의자인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오류를 반박하고, 또한 당시에 사악한 자들과 우상숭배자들로 말미암아 교황제도 안에서 받은 세례 때문에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것을 부인하고 재세례를 고집하는 재세례파의 오류를 지적하고,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에 대하여, 그 세례가 누구로 말미암아 베풀어졌다고 할지라도, 세례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칼빈 자신이 자신의 회심 후에 다시 세례를 받지 않았다. 사실 5세기 초에 많은 저술을 남긴 어거스틴(AD354-430)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비록 박해 시 배교자나 이단자가 베푼 세례라 할지라도 그것이 말씀대로 시행되었다면, 세례로서 타당하다고 인정하고, 이 때문에 재세례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비록 배교자나 이단자가 베푼 셰례의 타당성을 그 집례의 형식과 결부시켜 인정했다고는 하지만, 그 세례의 효과, 즉 사죄와 구원의 효과는 정통 가톨릭교회로 복귀하여 연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세례는 받았으면서도 사랑의 유대가 없으면 그 세례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어거스틴은 세례 받은 자의 신앙을 중시했다. 그는 성례의 타당성과 유효성을 구분해서 이해했다.
사실 PCA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 결정을 발견하게 된다. 1985년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1) 유효한 세례에 필요한 기준이 개별상황에 존재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지교회 당회가 가장 적합하다. 2)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부모(들)로 말미암아 유아로서 받는 세례는, 부모(들)이 후에 신뢰할 만한 고백이 부족하다고 판단될지라도, 세례를 받았다면, 재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 3)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회심자(개종자)로 세례를 받은 자는 그가 세례 시에 중생하지 못한 것으로 믿고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재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 4) 이 보고서는당회(들)에 추천된다. 또한 1987년 PCA 총회는 위의 결정에 몇 가지를 추가했다. 1) 총회는 위원회보고서와 소수보고서를 함께 받았다. 2) 총회는 이 문제를 개별적으로 처리하되, 하회에서 정상적인 검토와 통제를 거치든지, 아니면 법적인 절차를 거치도록 결정을 유보하기로 했다. 소수보고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가 이해되고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구주이신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 세례가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교회 역사 밖에 있는 이교의 세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로마 가톨릭의 영세자들 중 많은 이들이 성례 자체를 신뢰하도록 가르치며, 구주의 속죄제사를 경시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의 확고한 분개함을 표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적이 철저한 승리를 한 것은 아니다.
찰스 하지는 1845년 북장로교회(구학파)가 로마 가톨릭의 영세의 타당성을 부인하는 결의를 한데 대하여,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였던 그는 학교의 기관지를 통해 “1845년 총회”라는 긴 논문 속에 “로마 교회의 영세(세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서술하고 있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써 씻는 거룩한 예식인데, 이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짐과 은혜언약의 모든 은총에 참여함과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기로 약속함을 인치며 공포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예배모범에 실린 세례의 정의를 인용하고 있다. 찰스 하지는 이 정의에 3가지 중요한 사실이 담겨있다고 지적한다. 1) 세례는 물로 씻는 것이라고 하는 것, 2) 물로 씻는 모든 것이 기독교 세례 예식이 아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씻는 것이어야 한다. 3) 그러나 세 번째 특징이 이 세례의 정의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짐과 은혜언약의 모든 은총에 참여함과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기로 약속함을 인치며 공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찰스 하지는 당시 PCUSA의 예배모범과 교단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부터 그의 논의를 진행하여, 로마 가톨릭의 영세에 대하여, 위의 3가지 정의에 위배되는 지에 대하여 하나씩 하나씩 논의를 계속한다. 기독교 세례에는 바른 재료와 바른 형식과 바른 의도라고 하는 본질적인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바른 재료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물이요, 바른 형식은 성경대로 삼위일체 신조로 베푸는 것이요, 바른 의도는 세례 행위에 대해 입으로 공언하는 것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로마 가톨릭 영세는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특히 유아의 경우에) 세례의 절대적 필요와 일치된 유효성에 대한 로마교 학자들의 오류가 매우 크지만, 그것이 이 성례의 본질을 무효화시킬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찰스 하지는 자신의 논의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로마교의 제도를 비난하는 것과 로마 교회 교인들은 보편교회의 일부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교회 안에 있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그들의 세례는 기독교 세례이다.”
박형룡 박사는 그의 『교의신학 교회론』에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례의 정당성과 유효성을 논하면서, 성례의 정당성으로 1) 삼요건, 2) 집례자의 신앙적 준비, 3) 집례자의 법적 자격을 말하고 있다. ‘삼요건’이란 찰스 하지가 말한 대로, 바른 재료, 바른 형식, 바른 의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집례자의 신앙적 준비는 삼위일체의 근본적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들은 복음의 사역자로 인정되기 불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그리고 집례자의 법적 자격에 대하여 주로 말씀의 사역자 외에 평신도가 세례를 베푸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말했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제27장 3조와 갈릭 신도게요 제28조를 예로 들고, 세례의 유효성은 시행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도에 의뢰하지 않는다는 구절과 로마 교회의 세례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세례 받은 자는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박 박사는 이단들이 베푼 세례에 대해서는, 교회의 일반적인 태도는 이단파의 세례의 정당성을 인정하는데 찬성해왔으나, 이 경우에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교회의 신앙의 표준들로부터의 이탈이지, 복음의 근본적의 교리들의 부정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칼빈이나 찰스 하지의 입장과 상이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한편 미국의 동부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강의한 존 머리(John Murray) 교수는 성례의 정의와 효력과 필요성을 논한 다음, 성례의 유효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성례의 집례에 필요한 ‘삼요소’인 1) 물질적 요소, 2) 행위들, 3)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하려는 의도를 말하고, 결론에 이렇게 말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유효성이 집례자의 공식적 지위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는 질서와 단정함을 증진시키는 제도들을 제정하셨다. 그는 말씀의 설교와 성례의 집례를 위한 직원들을 임명하셨다. 이 질서로부터 떠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도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례가 진지함과 그리스도의 제도를 집행하려는 의도에서 집례 된다면, 비록 이 질서를 침해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들이 유효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을 비롯하여 우리와 입장을 달리하는 타 교단의 세례에 대한 존 머리 교수의 견해도 칼빈과 찰스 하지의 진통에 서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칼빈과 찰스 하지의 견해는 오늘날 미국의 보수적인 두 교단인 OPC와 PCA의 총회결의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III. 결론(제언)
우리는 예장통합의 총회결의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 예장 통합은 2004, 2014년에 이어 2017년에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로마(천주)교회의 영세를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연구보고 서를 받고 채택했다. 예장 통합은 이미 NCCK와 WCC 회원교단이다. 그리고 미국의 여러 개혁파 교회들이나 장로교회들(위에서 언급한 PCUSA, CRC, RCA, UCC 등)의 견해를 고려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미 미국에서 NCC와 WCC의 회원교단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란을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개혁파 교회들과 영미와 남아공의 여러 개혁파 및 장로교회들이 이미 WCC와 자기 나라의 NCC 회원교단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좋겠다.
1959년 우리 총회는 WCC에 대하여,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2014년 제99회 총회는 신앙과 직제일치협의회 운동에 대한 총회입장 및 대처의 건에 대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가톨릭과 정교회 간에 합의한 신앙과 직제일치를 위한 협의체 구성은 ”본 총회의 신학사상과 맞지 않음으로 반대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러므로 NCCK와 로마 가톨릭(한국천주교회), 한국정교회에서 시작한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과 직제협의회“에 대하여, 1959년 우리 총회가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배격한 결의정신과 또한 제99회 총회결의대로, 우리 총회의 신학사상과 맞지 않음으로 반대하고 배격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살펴보듯이, 우리 총회의 신앙고백서의 원문을 채용하고 있는 미국의 OPC와 PCA, 두 교단 모두가 로마 가톨릭의 영세를 인정하고 있거나, 아니면 권고하는 입장을 취하되 그 최종 결정은 당회에 맡기는 결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한 우리 헌법의 정치 총론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구교(또는 구파)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이교로 선포하는 것에 대하여도 우리의 신앙고백서와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신중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 우리와 신학과 신앙을 같이 하는 미국의 OPC와 PCA가 로마 가톨릭에 대하여 가지는 입장에 대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