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기 목사의 예수촌 사상과 농촌운동
김 병희 (대구 서변제일교회 담임목사)
Ⅰ. 서론
虛心 劉載奇(1905〜1949)목사는 일제시기와 해방이후 기독교계의 농촌운동과 한국근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기독교계의 흐름을 잘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근현대 한국사회의 주·객관적 조건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또한 한국근현대사의 변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유재기는 예수촌 운동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고자 했다.
그의 행적은 크게 일제시기와 해방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일제시기 유재기는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10년대에는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민족주의 흐름을 이해하고, 1920년대 교남학교, 일본 유학 등을 거치면서 농촌을 바탕으로 하는 온건기독교 사회주의자가 된다.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농촌교회 조사로 농촌순회전도 활동과 계몽활동을 주로 하였다. 1930년대 그는 그의 삶의 가장 중심이 된 예수촌 운동을 펼치면서 농촌운동가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해방 이후, 유재기는 활동공간을 대구·경북에서 중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당면한 조선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운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 그가 가장 중점을 둔 활동은 흥국형제단을 통한 예수촌 운동이었다. 이같이 유재기는 각 시기마다 농촌운동이론을 만들고, 운동을 실천한 목회자․농촌이론가․농촌운동가였다.
Ⅱ. 성장환경과 기독교 수용
1. 가계와 성장환경
유재기는 1905년 6월 19일,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용상리(어우실-터밭골)에서 농부인 유추열과 손기운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유추열은 朱子學을 고수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그는 비록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당시 영주지역에서 확산되고 있던 민족운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용상리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은거하고 있는 구한말 惠民院 主事였던 훈장 유재범에게 유재기를 맡겼다. 유재범은 한일합방 후 혜민원 주사직을 버리고 영주에 내려와 의병결집을 호소하는 通告文을 작성하여 돌린 인물이다. 유재범을 통해 유재기는 고전학문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을 쌓고, 상당량의 文集을 섭렵하였다. 이는 이후 그의 학문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2. 영주보통학교 입학과 기독교 수용
1880년 조선책략을 비판하는 영남만인소 운동과 1890년 위정척사사상을 기반을 둔 의병운동 그리고 1913년 풍기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인 광복단 등 영주지역 에서 형성되고 전개되었던 항일 정신은 직․간접적으로 영주지역 민중들에게 어느 정도 파급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유생들의 민족운동은 유추열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영주지역 계몽운동의 산실인 사립강명학교는 1903∼1909년경 향서당에 설립된 근대학교였다. 설립자는 향내 문중이었고 향서당을 교사로 사용하였다. 학생수는 20∼30명 정도였는데 1911년 조선총독부 교육령으로 공립으로 전환되어 영주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초대교장으로 일본인 마에바라 운사쿠(前原運作)가 부임했다. 그리고 한국인 교사는 朴齊宣 외 2명이었다. 朴齊宣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으며 나중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유추열은 자녀교육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민족주의 신학문을 받아 들였다. 이를 위해 더 나아가서 유추열은 영주로 이사하여 유재기를 민족주의 성향의 영주공립보통학교(이하 영주보통학교)에 입학시켜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 덕분에 유재기는 영주보통학교에서 3·1운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영주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영주시장에서 전개되고, 이것을 직접목격한 유재기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유재기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농우회 사건으로 취조 받을 때 그는 ‘영주지역 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족의식을 각성하여 미래 민족주의를 포회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밝혔다. 또한 해방 후에도 그때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일본의 갖은 虐待에 십년간 시달린 우리 겨레는 참다가 참다가 더 참을 수가 없어서 1919년에 삼천리 槿域의 방방곡곡에서는 드디어 애국심의 폭발이 되었던 것이다. 三尺 童子 엄트는 어린 아기로부터 백발 늙은이까지 모두 인파는 (중략: 인용자)눈물과 함께 天地에 사무쳤던 것이다. 三千方 同胞의 天心에서 북받쳐 울리는 이 성스러운 민족 운동을 무엇으로 막을것이냐? 왜놈의 포학한 야수의 창으로 칼로도 못 막았구나
당시 영주 3·1운동으로 민족주의 인식이 성장하든 유재기에 정신세계 형성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친 것이 기독교였다. 유재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유추열이 기독교를 접하게 된 계기는 계성학교 전도단이었다. 영주 지역에 처음으로 교회를 설립했던 강재원은 劉魯烈․劉仲烈․劉熙烈․劉載萬․劉載元․劉載命 등에게 1920년 8월 중순 내매교회에서 열린 대구 계성학교 전도단 전도강연회에 참석을 권유했다. 그 자리에서 유추열 형제들은 복음을 듣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아 기독교 에 입교했다. 유추열 형제들은 용상리에 기도처를 정하고, 내매교회로 왕래하며 예배를 드리다가 1921년 9월 15일 용상교회를 설립하였다.
당시 유추열 형제에게 큰 영향을 준 대구 계성학교 전도단은 대구 3·1운동을 주도한 세력에 의해 조직된 모임으로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전도활동은 대구지역 뿐만 아니라 경북 전 지역에서 환영을 받았다.
대구 계성학교 전도단의 활동은 영주지역교회 부흥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일반 민중들이 기독교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전도단의 전도를 받는 유추열 형제들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비난하는 문종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이들은 유교적 공동체의 기능이 파괴된 향촌사회의 정신적·도덕적 공백 상태를 기독교회와 새로운 학교 환경을 개선을 통해 이루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용상교회 설립과 함께 근대교육기관인 龍上學術講習會을 설립하게 된다.
특히 유추열은 3·1운동 이후 자신이 안고 있는 현실문제와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그는 “(전략: 인용자)신학문에 당해낼 재주가 없겠어 耶蘇敎란 종교가 유교나 불교와 달리 그것이 사람을 다시 나게 한다는 군(후략: 인용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의 불교나 유교로는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유재기를 기독교 학교인 계성학교에 입학시켜 신학문을 가르치기를 원하였다. 이같은 유추열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유재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유재기는 아버지 죽음 앞에서 “아버지 당신만이 유일의 동지였고. 내 思想 내 主義를 높이여 주신이도 내 사업 성공하라 빌어 주신이도 당신이었소.”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유재기는 1920년에 영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17살로 영주군청 小使로 근무했다. 얼마 후 유추열의 사업실패로 유재기 가족은 대구로 이사했다. 유재기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청도 백곡 慕溪 가문 김참봉의 집에서 훈장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유재기는 아이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조선 민족이 처해 있는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곤 했다.
1922년 유재기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청도 훈장을 그만 두고 대구로 왔어 교남학교에 입학하였다. 교남학교는 대구지역 3․1운동으로 服役 후 출옥한 洪宙一․金永瑞․鄭雲騏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족계열의 학교였다. 설립 목적은 교육을 통한 민족정신․민족의식의 토대위에 애국인재 양성이었다.
유재기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신문배달과 막노동을 하며 학업을 유지했다. 또한 여자야학원을 설립하여 40여 명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교남학교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받아 실천적 사회운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3. 농촌순회 전도활동과 농촌문제인식
그러나 1923년 2월 유재기는 결국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교남학교를 1년 다닌 후 중퇴하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낙심한 그에게 대구에 와 있던 Edward Frost Mc Farland(孟義窩) 선교사로부터 대구 선교지부로 와서 일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대구 맹의와 선교사는 유재기에게 조사로 일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맹의와 선교사의 助事가 되어 신령․연일·포항 등 경북 동해안 중심으로 농촌지방의 순회농촌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농촌지방 순회전도여행을 통해 “전 인구의 8할이나 된다는 조선농촌을 이대로 내버려져 있다가는 큰일”이라는 절박감을 느꼈다. 이 시기 그의 경험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농촌운동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령․연일지역 순회전도여행을 통해 농촌 현실을 경험한 유재기는 이러한 농촌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활개선과 진보적인 영농 방법을 통한 생산증대로 보았다. 당시 그는 농촌운동이 바로 애국운동이며 겨레를 위한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교회 주일학교를 중심으로 소년군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는 주일학교 소년들에게 부역과 마을 환경개선을 역설했다. 소년 뿐만 아니라 농촌성인을 대상으로도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농촌에서는 식민지 상황에 절망한 많은 젊은이들이 술에 젖어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첫째, 禁酒斷煙 운동을 시행하였다. 왜냐하면 당시에 술과 담배는 농촌 경제에 가장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둘째, 노동력을 절감한다는 차원의 생활개선운동으로 옷을 염색해 입자고 주장하였다. 셋째, 수확량을 늘릴 수 있는 영농방법 개선을 위해 소년단조직을 활용하여 퇴비증산운동을 벌였다.
당시 유재기가 진행하고 있던 농촌운동은 상당부분 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 배치되었다. 특히 마르타 스위처(Martha Switzer, 聖마르다)는 유재기에게 농촌계몽운동보다 순회전도여행를 통해 영혼구원에만 매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재기는 조선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유재기는 성마르다 선교사와 결별하였다. 이후 그는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유재기가 경북 영천·연일·포항지방 순회농촌전도활동을 하던 1920년대 일제 식민지 농촌지배정책으로 농민층의 몰락이 더욱 심화되던 시기였다. 일제는 1910년 한국 강점과 함께 농업경제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해, 한재와 병충해로 인하여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그 결과 당시 한국 농민들은 대부분 절대 빈곤의 상태에 빠졌다. 농민들은 수해와 한재로 인한 농촌피폐, 일제시기의 경제․정치적․종교적인 탄압, 가혹한 식민지 수탈정책 때문에 수많은 농민․빈민층이 생활 터전을 빼앗기고 대거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 농촌교회가 처한 현실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유재기는 이러한 조선 농촌의 피폐상을 생생하게 관찰하는 가운데 농민의 생활난에 깊은 우려와 동정심을 갖게 되었고, 농촌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조선의 장래가 農村問題의 해결에 달려 있다는 실천적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 농촌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Ⅲ. 기독교 민족운동과 예수촌 사상의 형성
1. 일본유학과 기독교 사회주의의 형성
유재기는 처음에 東京日進高等學校에 진학했다. 하지만 중퇴하고, 日本大學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그가 사회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앞으로 조선사회를 위해 일하자면 사회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일본대학 사회학과에서 유재기는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많은 지식을 얻을 수가 있었다.
당시 유재기는 학교 교육뿐 아니라 많은 독서를 통해 배움을 얻기도 했다. 특히 일본 내에서도 기독교 사회주의 입장인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스기야마 모토지로(杉山元治郞)의 책을 통해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계급문제를 이해하고, 기독교 관점에서 조선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얻게 되었다.
유재기는 일본 유학에서 필요한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 약장수, 낫또(納豆)장수, 풀빵장수, 신문배달을 비롯하여 시바우라(芝浦)포구에서 노동도 하였다. 일본에서의 생계를 위한 최하층 생활은, 그에게 계급에 기반한 사회 제문제 발생과 그것을 해결하는 방안을 찾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일본 유학생활에서 유재기는 가가와의 자서전적 소설 『사선을 넘어서』를 읽고 큰 감화를 받았다. 유재기는 그 소설의 모델이 된 新川에 있는 빈민촌을 자주 찾았다. 新川빈민굴은 가가와가 이곳에 들어가서 5년 동안 가난한 자와 생활하면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봉사와 함께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한 곳이었다.
유재기는 “사회주의가 自由와 平等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基督敎社會主義란 말은 그리스도의 根本精神으로서 現實 人類社會에 참된 自由를 주고 참된 平等의 社會組織을 목적하는 운동을 가르치는 것이다(중략: 인용자). 우리 기독자로서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진 자를 가리켜서 基督敎社會主義者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기독교 사회주의자임을 주장하였다.
유재기는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해서 구분하고 있었다. 유재기는 사회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는 현실의 불합리한 계급투쟁은 죄악으로 파악하였다. 계급투쟁은 맑스主義의 論說대로, ‘歷史가 存續하는 限 停止됨이 없다’고 보았다. 현실 無産階級이 勝利하였다 하나 顚倒된 피지배계급이 또한 불만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유재기가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가가와․기야마 모토지로(杉山元治郞)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가가와의 주장처럼 폭력적 계급투쟁,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조직, 그로 인한 사회적 결과로 오는 계급적이며 차별적인 대립를 반대하고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愛的 方法에 의한 改良主義를 취하였다. 그는 복음주의적 성서에 입각한 불합리한 현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기독교의 근본정신으로서 개량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地上에 이루어지도록 싸워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유재기는 가가와의 농민복음학교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1920년대에는 예수촌운동을 시작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흥국형제단을 결성하여 농민복음학교와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예수촌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재기는 1924년 일본 유학 중 일본 협동조합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기야마 모토지로(杉山元治郞)의 『協同組合の理解と實際』를 읽고, 협동조합을 통해 일본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스기야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스기야마가 만든 협동조합의 목적은 농촌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즉, 농촌으로부터 가난을 없애고, 노동력 착취로부터 해방되어 인간답게 살며, 보람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스기야마는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경제력·정치력으로 농촌을 지배한 지주층은 약화시키고, 기독사상을 바탕으로 궁핍한 농민층의 입장에서 지주의 착취와 압박으로부터 농민생활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유재기는 협동조합의 목적을 中間搾取인 利潤制度의 철폐, 愛의 運動, 自力更生, 新社會實現에 두었다. 농촌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이윤제도 철폐를 통해 농촌을 개선하고, 愛의 運動으로 愛의 道德을 근본으로 하여 相扶相助하여 共榮을 이루고, 자력 갱신하여 협동을 이루고 농민들의 이익을 주장하였다.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산물인 貧窮, 犯罪, 疾病, 自殺, 雜婚, 不平等, 階級 등 사회문제를 협동조합으로 新社會實現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협동조합운동은 바로 社會改良運動이었다. 유재기는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계급문제를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다.
유재기는 사회개량운동의 일환으로 방학 때는 한국에서 과거 농촌교회 순회사업에서 순회한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설교를 통해 우리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은 농촌 갱생에 달려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농촌계몽강연회를 개최하여 예수촌운동을 전개하였다.
2. 숭실전문학교 진학과 기독교 민족주의의 영향
21살에 유재기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1926년에 농촌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농과강습소에서 기본적인 농촌기술에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는 숭실전문학교에서 학생전도대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조만식·배민수․최문식․박학전․김성원 등을 만나 기독교농촌연구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실천했다.
유재기는 숭실전문학교 농과강습소 입학 후 가가와의 新川 빈민굴을 모델로 하여 평양 빈민굴 토성낭에서 생활하며 야학을 실시하였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경제학 교수로 평양YMCA 총무였던 曺晩植을 만나게 된다. 조만식과의 만남은 유재기에게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민족문제를 해결하고, 농촌운동을 실현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유재기는 1920년 후반 조만식의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평양에서 조만식이 주관하는 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하였다. 또한 조만식은 유재기에게 장순덕을 중매하고 결혼식에 참석하여 장순덕의 결혼식 중매인으로 축사와 인사를 하였다. 축사에서 “오늘 유재기 선생의 결혼식은 어느 누구의 결혼식보다도 진심으로 기쁘고 축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선생은 아시다시피 조선의 끄른드비히로서 장차 이 땅 이 민족의 농촌을 위하여 일할 청년이며 그 사업은 이미 시작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같이 유재기에게 있어서 조만식은 정신적인 지주와 같은 존재였다. 그가 농촌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조만식의 지도를 받았다. 유재기는 조만식의 기독교 민족주의 사상에서 그 동안 고민해왔던 민족문제에 대한 방안을 찾았다.
유재기의 신앙은 평양신학교 입학으로 철저한 기독론(기독교 정신)에 기초를 두었다. 그는 평양신학교 재학 중 『농촌소년지도론』,『협동조합론』을 저술하여 예수촌운동을 구상하였으며, 평양일대 순회하며 예수촌운동을 전개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30여 교회에 기독농촌소년단을 조직하고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할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 성과로 1931년 8월에는 대동 청용면 이천리에서 기독교농촌소년단연합회를 주최하여 소년 계몽운동을 주도하였고 농산가공품전람회를 열어 큰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경창리·토성랑 빈민촌에서 생활하며 빈민선교를 전개하였다. 그의 평양신학교 입학은 기존 교회조직을 통한 효과적인 예수촌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유재기의 농촌문제·민족문제에 대한 고민은 평양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숭실전문학교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통해 기독교 민족주위 이해와 조만식의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통해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사상이 체계화되었다.
3. 기독교 민족주의와 예수촌 思想
한국교회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촌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현실을 보면, 인구의 80%가 농민이며, 그 가운데 80%가 소작인이었다. 사실 농민․농촌문제는 1920년대 한국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농촌 실정에 대해 장로교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장로교가 농촌운동을 시작하게 된 몇 가지 이유는 첫째, 장로교회는 3·1운동으로 극심한 피해를 당하여 급격하게 교인수가 감소했다. 둘째, 장로교회는 교인 수 감소와 교회 성장 동력 상실 그리고 농촌문제로 인한 교인 이주로 교회 내 재정이 감소하였다. 셋째, 장로교회 교인수 감소와 교회재정 감소 현상은 농촌교회의 경제적인 침체에서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넷째, 1920년대 들어서면서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대응이다. 다섯째, 조선의 현실을 농촌운동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 국제선교사들의 합의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장로교 총회는 1928년 농촌부를 설치하고 장로교 농촌운동(1928-33)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평양을 중심으로 농촌운동을 전개한 유재기 그룹이 기독교농촌연구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농촌연구회(이하 농촌연구회)는 1928년 평양 YMCA 총무였던 조만식의 집에서 유재기·배민수·최문식 등 숭실전문 학생출신의 YMCA 회원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농촌연구회 활동 목표는 조선농촌에 대한 일반문제 연구, 기독주의적 농촌사업을 실현, 회원을 양성하여 실제사업에의 투신으로, 크게 세 가지였다. 이는 ‘기독주의적 농촌사업과 귀농운동, 실천운동’을 표방하며, 장로교 농촌운동과 관련을 맺고 농촌교회 단위로 기독농우회와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등 현장중심의 사업방식을 전개하였다.
유재기는 농촌연구회의 사업성과를 토대로 농촌운동을 기독주의 사상의식으로 무장하고 농촌운동을 ‘정신적 물질운동’으로 규정하였다. 1931년 유재기는 한국의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예수촌 건설운동으로 해결방안을 정립하고 농촌연구회를 중심으로 예수촌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재기가 표방하는 예수촌은 예수의 사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립적 기독교 농촌공동체인 지상천국으로서의 유토피아인 ‘이상촌’이었다. 그는 조선의 농촌현실을 종말론적 시각에서 ‘지옥’으로 파악하고, 빈민구제와 빈민복음을 목표로 삼았다.
유재기의 예수촌 건설운동은 예수의 사명과 형적을 농촌에 실천하는 ‘한손에는 복음을 들고 한손에는 쟁기를 들고’ 영적생활과 물질생활을 동시에 책임지는 예수촌을 건설하여 이 땅에 기독교왕국을 세우고 영원한 천국복음을 누리게 하는 예수촌 건설에 목표를 두었다. 이것은 기독교 보수주의자와 다르고 일제 농촌진흥운동과도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유재기의 예수촌 운동은 농민을 자영농으로 만들어 상부상조하여 자본주의 수탈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유재기는 자본주의 이윤제도와 중간수탈을 극복하고 신앙을 현실 속에서 생활화하는 “유기적 조직체”이자 “천국운동의 유일한 애(愛)의 실현”이라 강조하였다. 유재기와 농촌연구회는 예수촌 건설 실천 방안으로 기독교농우회 조직하여 기독교 협동조합운동을 실시하였다. 이 기독교농우회는 철저한 협동조합 형식과 기능을 갖춘 기독농민조직․기독교복음조직이었다. 또한 농우회는 예수촌 건설의 기반조직이었다.
이러한 농촌연구회의 농촌운동은 농우회조직, 협동조합운동, 소비조합 3단계로 진행되었다. 농촌연구회의 농촌운동은 기독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농촌 마을 단위의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예수촌을 건설한다는 목표 아래 지방 농촌교회와 연계된 농우회를 조직하고 농민 신자들의 경제자립과 복음화를 동시 추진한다는 기독교 협동조합운동이다. 이러한 이념과 방법론에 입각하여 연구회는 결성한지 3년이 지난 1931년에 전국에 농우회 조직이 30여 곳에 이르게 되는 성과를 보았다.
Ⅳ. 1930년대 장로교 농촌운동의 전개와 농우회운동
1. 1930년대 장로교 농촌운동의 전개
유재기는 지금까지 축적한 협동조합 이론과 지업적인 농촌운동을 전국적으로 실현하는 계기가 된 것은 장로회 농촌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는 1934년 5월 4일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장로교 총회 농촌부 서기로 임명이 되었다. 이는 그 동안 농촌활동과 농촌운동의 전문가로서 그의 역량이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재기가 중심이 된 후기 장로교 농촌운동은 예수촌 건설의 대강목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한 제반 기초 사업을 추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것은 ①협동조합운동, ②농촌지도자 양성, ③농촌수양회 활동, ④농촌계몽운동 등 크게 네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하 농촌부가 해체되기까지 각 방향에서 전개된 농촌운동의 요점과 특질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협동조합운동
농촌부 협동조합운동은 농촌교회를 단위로 전개되었다. 그 같은 방침은 협동조합운동을 단순한 경제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신앙을 생활화하는 계기로 삼고 아울러 이를 통해 침체된 농촌교회를 회생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회단체로서 지부조직을 가지고 있는 YMCA와 달리 교회조직인 농촌부는 농촌교회가 협동조합 조직 기반이자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침체되어 있는 농촌교회를 회생시키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이것은 그가 ‘1교회 1조합주의’ 나아가 조합에서 총이익의 십일조를 교회에 헌납하는 세부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 방안을 유재기가 주장한 것은 농촌교회의 경제적 안정뿐 아니라 교인의 생활안정까지 도모하기 위해서다.
유재기의 협동조합은 교회를 거점으로 상호부조적이고 자립적인 기독교 농촌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곧 자본주의 경제제도 내에서 교회와 협동조합을 매개로 생산과 노동, 소비생활을 공동조직하여 유통기구의 중간수탈을 배제하고 농업생산력을 증진시켜 자작농 체제에 입각한 자립적인 기독교 예수촌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또한 토지 회수의 유일한 방법이며, 고리선을 끊고 중간이할을 개조하는 소비조합적 성격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
|
설립자(단체) |
지역 |
교파 |
설립
시기 |
회원 |
활동 |
|
1 |
신녕부인회 |
경북 영천 |
장로교 |
|
40명 |
조직당시출자액 100원 |
|
2 |
평사부인회 |
경북 의성 |
장로교 |
|
20명 |
조직당시출자액 6원
금년도현재액 280원 |
|
3 |
옥정협동조합 |
경북 의성 |
장로교 |
1934 |
17명 |
조직당시 출자액34원
금년도현재액 85원 |
|
4 |
칠곡협동조합 |
경북 칠곡 |
장로교 |
1935 |
32명 |
조합당시출자액 300원
금년도현재액 528원 |
|
5 |
우천소비조합 |
경북 영천 |
장로교 |
1935 |
12명 |
조합당시출자액 23원
금년도현재액 52원 |
|
6 |
매곡소비조합 |
경북 의성 |
장로교 |
1935 |
15명 |
조합당시출자액 7,50원
금년도출자액 29원 |
|
7 |
양지협동조합 |
경북 의성 |
장로교 |
1935 |
9명 |
조합당시출자액 7원
금년도출자액 20원 |
|
8 |
협동조합
(소비조합) |
함북용천 |
장로교 |
|
|
음주․도박․미신 타파운동 공동구입․판매 |
자료 : 『基督申聞』『靑年』『慶北老會會錄』
그의 이러한 활동은「표 1」처럼 일정정도의 성공을 이루었다. 그는 특히 1935년도를 기점으로 영천(2곳), 의성(4곳), 칠곡(1곳) 등 주로 경북 지역에서 활동을 하였고, 그 중에서도 그가 목회하는 의성을 중심으로 활발히 설립 운영되었다.
②농촌지도자 양성
유재기는 농촌경제 자립의 실천적 방안으로 제시한 예수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촌지도자 양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③농촌수양회 활동
장로교 전기 농촌부는 농촌사업협동위원회에서 주관한 농사강습회에 공동으로 참여하였다. 농촌강습회는 직접 농촌 현장을 순회하며 전개된 동절기 농사강습 프로그램이었다. 농촌부는 설립 초기부터 농사강습회를 계획하였지만 인력 부족과 관련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는데, 후기 농촌부 경우는 농촌순회활동이 농촌복음운동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이를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농촌의 기독교화”를 활동 목표로 삼고 명칭도 농촌수양회로 변경하여, 1933년 동절기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표 2>장로교에서 개최한 농촌수양회
|
|
일자(명칭) |
지역(장소) |
강사 |
과목 |
성과 |
|
|
1 |
1930 |
21개 지역 |
|
|
|
|
2 |
1933.3.20∼25
(평북농사강습회) |
평북 선천(신성학교) |
김형식·박병윤·계병호·조인성·김성원 |
과수재배·작물재배·축산·양계·양봉·비료·토양 |
|
|
3 |
1933.6.28부터 1주일 |
함북 종성(삼향동교회) |
번스·계병호·김성원 |
|
|
|
4 |
1933.11∼1934.3 |
충청·경남·경북·의산·안주·평양 |
|
농촌복음·농사지도·가사·교양·강연 |
가입회원 647명 / 청강자4,800명 |
|
5 |
1933.11.22∼29(농촌수양회) |
평남 평양(황주읍교회) |
김성원·김상근·
유재기·최순옥·배민수 |
성경·稻作·과수·양돈·작물·비료·채소·양계·토양·해충·양잠·病理·축산·가사 |
|
|
6 |
1933.12.18∼(농촌수양회) |
충북 청주(국사교회) |
김상근·김혜택·
최순옥·배민수·우리암 |
도작법·비료·채소·과수·축산·과사 |
회원 60여명 |
|
7 |
1934.2.5∼3.12 |
의산·평양·안주 |
김성원·배민수 외 2 |
|
|
|
8 |
1934.2.27∼3.5(평양노회 농촌수양회) |
평남 평양(황주읍교회) |
김성원·류소·유재기·최순옥·배민수·김혜택 |
조합론·도작·과수·양돈·양계·작물·비료·채소·토양·병리·축산·가사·보육위생·재복·요리 |
15세 이상 남녀교인 비교인은 지역교회 추천 |
|
9 |
1934.3.6∼13(평양노회농촌수양회) |
평남 안주(성내읍교회) |
김성원·류소·최순옥·배민수 |
성경·과수병해충·양돈·양계·작물병해충·비료·산양·육아·재봉·요리 |
|
|
10 |
1934.8.1∼7(용촌노회농촌수양회) |
평북 용천(양시교회) |
류소·김재억·조두서·이근태 |
작물·과수·비료·축산 |
|
|
11 |
1934.11∼1935.3 |
동만·함북·함남·경기·충청·경남·경북·황해·평양·안주·의산·평북·용천(13노회 15개소) |
김성원·계병호·
유재기·최순옥·배민수 |
성경·전도·전도강연·비료·작물·채소·과수·축산·협동조합·가사·위생 |
4,500명 지도 결신자 86명 경제상 윤택 협동조합 3개소 설치 / 묘목을 배급·선전 |
|
12 |
1934(충청노회) |
능월리교회 |
|
|
|
|
13 |
1935.2.18∼23(평양노회농촌수양회) |
평남 대동(두단리교회) |
김성원·김상근·유재기·최순옥·배민수·채필근·정재호·송상석 |
성경·비료·토양·과수·채소·협도조합·실제지도·가사교양 |
|
|
14 |
1935.12.8∼12 |
경남(마산교회) |
김성원·유재기·
최순옥·정석보 |
|
|
|
15 |
1935.12.12∼17 |
경남(밀양교회) |
유재기 |
|
40여명 강습 |
|
16 |
1935.3.11∼13/3.13∼17(평북노회농촌수양회) |
평북(곽산교회·승지교회) |
김성원·유재기 |
|
|
|
17 |
1936.1.1∼7 |
경남 창원 |
김성원·배민수 |
농촌상식강좌·진리교수 |
|
|
18 |
1937.1.8∼12 |
평북 |
|
|
|
|
자료 : 『基督申報』 1933∼1937; 『農村通信』 1935. 4 「農村巡廻의 一萬里(2)」 |
「표 2」에서 농촌수양회는 장로교 신자가 많은 평북(5곳), 평남(5곳), 경남(5곳)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농촌순회활동을 전개하였다. 농촌수양회는 1934년까지는 농학과 교수들도 동참하여 같이 활동하였으나 1934년 이후에는 대부분 후기 농촌부 임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강사는 농촌부 임원을 맡은 유재기․배민수․김성원․최순옥․계병호 등이었고 이들은 각지를 순회하며 농촌수양회를 주관하였다. 이들은 각각 성경․전도․전도강연․비료․작물․채소․과수․축산․협동조합․가사․위생 등의 과목을 맡았다.
농촌수양회 활동은 농촌복음화가 중요한 목적이었다. 여타 기독교 농사강습회와 달리 일반적인 농사지도 강습이나 농촌교육 활동에 그치지 않고 농촌복음 과목을 첨가하였다. 특히 밤 시간은 비기독교인을 전도하기 위한 집회로 개최되었다. 유재기가『農村通信』에 연재로 기고한「農村巡廻의 一萬里」를 살펴보면, 1934년 2월부터 1935년 9월까지 진행된 순회농촌수양회 강사로 농촌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유재기는 각 노회 농촌부와 연계하여 농촌수양회를 개최되었고, 수양회 마지막 날은 기독교부인소비조합과 협동조합을 조직하여 예수촌 운동을 전개하였다.
④ 농촌계몽운동
장로교 농촌부는 먼저 농촌복음화와 관련하여 함경도와 경기도 일원의 농촌에 전도사를 파견하고 농촌교회 순회 전도강연 및 부흥회를 지도하여 신입교인을 얻는 한편으로, 1935년부터 봄·가을로 농촌교회 진흥주간을 설정하여 강연과 농촌전도지 배부 등을 통해 농촌교회 부흥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복음주의 농촌운동의 이념과 논리를 선전하고 농촌교회와의 연락을 원활히 하기 위해 소식지 형태의『農村通信』을 1935년 3월에 새 기관지로 간행하였다.
특히 유재기는 전국적인 농촌운동과 함께 자신의 목회 지역인 대구․경북지역에서 협동조합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표 1>에서와 같이 타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消費組合이 설립되었다. 또한 유재기는 기존에 발행된『敎會報』통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敎會報』편집장이 되어 노회에 예산을 증원하고『敎會報』명칭을 교회시보로 변경 허락 청원하였고, 지면도 4면에서 12면으로 간행하여 각 교회로 배포하였다.
유재기의 농촌운동은 기독교적인 정신을 기초한 협동조합운동으로 민족문제와 농촌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의 농촌운동은 자립적인 민족경제건설을 목적으로 하였고, 적극적인 정치적 반일투쟁이 아니었지만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닌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농촌운동은 ‘우리농촌의 그리스도교도화’로서 농촌복음화를 일차적 목적으로 하는 운동으로 농업의 문제 인식과 농촌재건론도 그 선상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유재기를 중심으로 전개된 장로회 농촌운동은 당시 정치정세와 함께 농촌부 운동도 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내부적으로 첫째, 농촌부의 기반과 조직역량의 구조적 취약성 문제가 있었다. 둘째, 배타적 복음주의 의식과 실천관은 장로교의 내부역량을 결집시키기 보다는 운동의 분립을 초래하였다. 셋째, 교단 내부의 뿌리깊은 보수주의자들의 농촌운동에 대한 비판은 농촌부활동의 주요한 장애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파시즘체제의 강화에 따른 일제의 탄압과 정세 악화는 기독교 농촌운동의 존립을 어렵게 만들었다. 장로교 농촌부의 공식활동 역시 1936년 하반기에 접어들어 농촌수양회 활동을 제외한 각종 사업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2. 농우회운동의 전개와 농촌운동의 좌절
여기에 1936년의 군부내각 성립,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 등 일제 군부 파시즘의 확립과 함께 본격화되기 시작한 기독교 세력에 대한 탄압과 민족말살정책은 기독교 농촌운동이 해체되는 배경이 되었다. 1938년에 접어들어 일제의 탄압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장로교 교단은 황민화정책에 순응하였고, 유재기는 ‘기독교농우회’ 사건으로 인하여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유재기는 장로회 총회 농촌부의 폐지로 농촌운동을 청년면려회운동을 통해 농촌문제와 민족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는 1935년 1월 초순 32세의 젊은 나이로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교회 목사로 부임을 시작으로 청년면려회운동을 중심으로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성교회 부임은 1929〜30년경 대구에서 기독교 활동 중 친분을 가진 오진문이 유재기를 의성교회 목사로 추천한 것이 배경이 되었다.
유재기는 의성교회에서 청년면려회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내부 개혁을 할 수 있도록 3대 규약에 근거한 조직 또는 협동조합에 의한 세포조직을 시도하였는데 의성교회의 오하수·김정욱 장로 등이 이러한 단체를 조직하면 교회가 경찰의 사찰 대상이 됨을 이유로 격렬히 반대하였다. 또한 하양교회 전도사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진문 역시 의성지방은 1930년 두 번의 민족독립운동사건으로 검거된 이래 특히 경찰의 감시가 엄중하여 단체를 조직하는 것은 절대불가한 곳이라고 하였다.
유재기는 의성교회 이재인과 오진문에게 하양․신령 및 북조선에 있어서의 3대 규약에 근거한 활동 상황을 설명하고 자택에서 오진문․이재인과 함께 협의를 마친 결과 청년면려회 부문을 개혁하고 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자각시키고 조선독립의 소지를 양성하기로 하였다.
먼저 종교부는 매월 첫째주에 특별기도회를 가져 조선독립성취를 기원하고, 조사부는 회원의 동정 및 경찰관의 시찰상황을 탐사·보고를 담당하였다. 농촌부는 공동경작․농사강습 등의 사업을 실시하고 또한 농민을 상대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체육부는 스포츠 활동을 통해서 정신적․육체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활동을 전개하여 민족적 단결로 독립을 성취하려고 하였다.
의성 경찰서는 교회를 평소 내사하고 교인들의 동태를 감시하였고, 1938년 5월 28일 의성경찰서 배만수 형사가 이동수를 먼저 연행하였고, 교회를 수색하여 교회일지, 당회록, 제직회의록 및 각 자치기관의 회의록과 기타 장부 등 각종 서류와 서적을 압수해 갔다. 그 중 청년면려회의 회의록에 기록 된 총회시 유재기의 “청년들이여 소금이 되라”라는 설교를 문제삼아 청년회장 이재인를 비롯하여 박대환․정해룡․구학수․박인수․백치문․이동수․천성훈 등 청년회 임원들과 정일영 목사와 오진문를 의성경찰서 유치장에 체포 구금하였다. 의성유치장이 비좁아 박대환․이재인․정해룡․천성훈․백치문은 안동경찰서 유치장에, 정일영 목사, 구학수는 군위경찰서 유치장에, 오진문 장로는 청송경찰서 유치장에 각각 분산 구금하였다.
그 후 1938년 6월 8일, 대구 침산동교회에서 시무 중인 유재기를 의성경찰서 배민수 형사와 다른 형사가 가택수사를 하여 책 등 기타 서류를 압수하여 택시에 싣고 유재기를 대동하여 의성으로 갔다. 유재기는 의성으로 압송되어 취조 후 압수한 회의록 및 문서 및 청년면려회원들의 진술 등을 종합 조사한 결과 조선독립을 달성할 수 있도록 농촌연구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전국 각지에 협동조합, 소비조합 등의 단체를 조직하고 이들을 통하여 농민 각 계층에 투쟁의식을 주입하였음을 인정하고, 농촌연구회의 취조 대상자중 경성 박학전 목사, 평양 최달형(치과의사), 평양 송영길 목사, 도미 배민수 목사, 평양 노원찬(회사원), 평양 이유택 등과 평양 주기철 목사 그리고 신령교회의 박재두 장로 등이 의성경찰서에 압송 수감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39년 1월 25일 유재기, 이재인, 오진문은 치안유지법위반 죄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된 후 동년 2월 4일, 오진문과 이재인은 각각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유재기는 동년 4월 14일,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대구복심법원에 항소 후 같은 해 5월 1일 역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농우회 사건으로 유재기는 구속되었고 일제당국은 매년 3월 1일이나 무슨 사상문제로 사건이 있을 때면 유재기를 며칠씩 구금시켰다. 그는 일제에 의해 18번이나 검속을 당하였다.
그 후 농우회는 그 동안 농촌운동을 전개하여 전국 각지에 80여 협동조합을 조직했으나 농우회 사건으로 1개의 조합도 남김없이 해체되었다. 또한 의성교회도 1940년 12월 23일에 의성 경찰서의 탄압으로 예배당이 폐쇄되었다.
농우회 사건은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이후부터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국민에 대한 황민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것과 시기를 같이 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유재기의 농촌운동은 장로교 농촌부 폐지와 농우회 사건으로 좌절로 끝났다.
Ⅴ. 국가건설운동과 농촌운동의 재개
1. 해방 후 건국운동과 기독교의 동향
해방 후 우리 민족의 당면과제는 자주적이며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과 일제하 피폐해진 농촌사회·농민생활을 안정시키는 農業改革문제였다.
해방 이후 가장 심각한 문제는 토지와 식량문제였다. 인구의 8할이 영세소농이었다. 지주제와 일제 독점자본․금융자본의 농촌 지배로 집약되는 일제하 식민지 농업구조의 개혁은 봉건잔재․친일잔재를 청산하고 신국가건설의 토대를 다지는 일차적인 과제였다. 따라서 개혁의 관건은 지주제를 폐지하고 耕者有田․農民本位의 원리를 따라 농민층의 재생산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토지개혁방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개혁을 통해 분배된 토지는 전체 면적의 66%에 불과했다. 한편 해방 이래 만성적 인플레이션, 경작지 부족과 물가 상승은 가뜩이나 열악한 영농조건과 낙후된 생산여건 하의 농민생활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해방 후 기독교계에서도 다양한 민족국가 건국운동을 진행되었다. 먼저 1945년 9월 초에 북한에서 尹河英·韓景職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은 현대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사회주의적 이념을 지닌 정당이었다기보다는 민주주의 정부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 개량을 그 政綱으로 삼았다. 즉 기독교 사회 윤리 정책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계엄령을 내리고, 간부를 검거하는 등 교회조직을 탄압하자 그 활동을 계속하지 못했다.
남한에서는 金在俊 목사가 ‘善隣兄弟團’을 만들었다. 선린형제단은 김재준이 교사로 봉직하던 간도 龍井의 恩眞中學校 기독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선교·의료·교육·육영·농촌 봉사를 겸한 사회사업,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 참여를 행동 강령으로 삼아 모인 신앙 집단이었다. 김재준은 집회에서 〈기독교의 건국이념: 국가 구성의 최고 이상과 그 현실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기독교의 건국이념을 제시하였다. 그는 새로 건설되려는 국가가 신앙과 예배의 자유, 언론·집회·출판 및 개인 양심의 자유를 확보해 주는 정부 수립을 요청하였다. 그의 국가건설 이념은 자본주의 사회도 아니요, 공산주의 사회도 아닌 그 양극성을 극복한 기독교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배민수를 중심으로 반공주의 국가건설운동도 전개되었다. 배민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세계는 이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간주하였다. 그에게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방어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보루였다. 당시 국가건설을 둘러싼 이념적 대립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자유와 독재의 대립이라는 논리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우익 진영의 일반 논법이었다. 특히 기독교 진영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립과 일체화시키면서 우익 진영의 국가건설 이념과 논리를 강력히 뒷받침하였다. 배민수의 반공민주주의 정치의식, 기독교 국가건설관 역시 그러하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건국운동은 세 갈래로 전개되었다. 유재기의 건국운동은 김재준 목사 계열의 건국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전개되었다. 유재기는 정치적인 면에서 김재준의 기독교 사회민주주의 국가건설 이론에 일정한 영향을 받아 건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경제적인 면에서는 예수촌 운동을 통해 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경제적인 해결방안으로는 토지개혁의 기본 골격인 耕者有田의 원리에 따라 개혁이 추진되기를 기대하였다. 그의 토지문제에 관한 인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土地는 農民에게 있어서 基礎問題이다. 農土없이 農民이 經濟的으로 生活上으로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土地는 農民에게로’하는 것이 農村問題의 根本原理이요, 正義인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 피폐한 농촌을 재건하는 것과 조국을 재건하는 유일한 길을 예수촌 운동에서 모색하였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기독교 흥국형제단을 결성하여 예수촌운동을 전개하였다.
2. 기독교 흥국형제단과 『興國時報』
1945년 12월, 서울에 도착한 유재기는 농촌운동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으로 재인식하고 재기를 다짐하는 의미로 자신의 이름을 載寄에서 再起로 개명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 잠시 우익에도 참여하였다. 그것은 농촌에서 농민위원회를 조직하여 농촌교회를 위협하던 사회주의 세력으로부터 농촌을 보호하기 위한 일면도 있었다. 또한 독립촉성국민회 사업부장직도 좌익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으로 인해 참여하였다.
유재기는 국가건설운동의 일환으로 기독교흥국형제단(이하 흥국형제단)을 창단하였다. 유재기는 흥국형제단을 통해 국가적인 운명을 책임질 수 있다는 큰 사명감을 가졌다. 흥국형제단은 1946년 10월 16일 서울시 황금정(현 을지로)에 있는 흥국호텔에서 첫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흥국형제단 조직을 보면 총재 함태영, 부총재 유재기, 회계 정훈․박위준, 감사 이명하․이원우 등을 선출하였다. 흥국형제단 하부조직으로 총무부․재단부․전도부․사회사업부․농촌부․상담부․흥국시보․흥국산원 등을 설치하였다. 첫 흥국형제단 창립총회에서 예수촌으로 지정된 촌에 직접 전도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위해 1946년 겨울 농한기를 이용하여 이동 농민복음학교를 개설하여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기로 했다.
그 결과 농민복음학교는 14회에 걸쳐 수료생 448명과 청강생 수천 명에 예수촌 십자군으로 양성시켰다. 또한 농민복음학교 출신의 농촌지도자를 중심으로 300여 곳에 협동조합을 결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49년 11월 15일, 제3회 흥국형제단총회에서는 흥국소학교와 농민복음학교를 개설하기로 결의했다. 소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역할에 주목하여 흥국부인부도 개설했다. 부인부 초대부장에는 김말봉이 선출되었다. 한편 일반대중을 이끌 수 있는 젊은 문화인에 관심을 기울였다. 흥국형제단 본부안에 있는 원예술좌방에서 특별히 종교예술과 문화부분에 활약하는 젊은 기독인들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흥국형제단의 설립취지는 강령에 잘 나타나 있다.
① 우리는 조국을 기독의 정신으로 무장토록 興隆케함.
② 우리는 기독의 兄弟愛로써 단결을 聲固히함.
흥국형제단 강령에서는 기독교 정신으로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였다. 특히 단순한 종교 모임이 아니라 민족운동의 실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흥국형제단의 주요사업은 정준이 쓴 ‘흥국형제단총회 참관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① 운영 중인 興國호텔․興國時報․聖化館․興國印刷所․興國産院․예수村建設運動 등
新事業 결의한 것.
② 傳道牧師를 採用하여 예수촌건설운동 추진의 건.
③ 농촌지도자 양성기관 설립의 건.
④ 聖化館을 黃材景목사께 위임하여 기독교예술운동을 전개할 건.
흥국형제단의 주요활동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예수촌건설운동을 위한 흥국호텔․흥국시보․성화관․흥국인쇄소․흥국산원사업이었다. 두 번째는 기독교예술운동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흥국형제단은 효율적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흥국형제단 支部를 결성했다.
흥국형제단은 하기양수회를 개최하여 영성적인 각성을 촉구하였다. 하기수양회에 참석한 사람은 주로 형제단원 및 농민복음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수양회 기간은 1주일간 진행되었다. 수양회 과목과 강사를 보면, 성경강해(최윤관), 신학강좌(송창근), 기독교와 사상문제(김재준), 농업협동조합의 실제(유재기), 예수촌론(유재기), 농촌위생강좌(김영춘), 농촌문제연구(조민형), 丁抹농촌소개(정준) 등이다. 이와 같이 흥국형제단은 수양회를 통해 그동안의 운동을 반성하고 새로운 재기의 결의를 진작하였다. 또한 농민복음학교 졸업자의 연장교육 기간으로 활용하였다.
유재기는 1946년 1월 15일 흥국형제단 활동과 더불어 예수촌 운동을 홍보하기 위하여『흥국시보』를 창간했다. 당시 김구 선생이 『흥국시보』의 제호를 직접 쓰기도 했다. 『흥국시보』의 사장은 함태영 목사, 주필은 김재준 박사, 편집은 유재기가 맡았다. 처음에는 프린트로 시작했으나 곧 타블로이드판 8면의 활판 인쇄물로, 월 2회 발행했다. 그러나 극심한 재정난으로 신문을 정기적으로 간행하지 못했다. 월 1회만 발행되기도 했다. 『흥국시보』는 월 2회로 5,000부 이상을 발행하였다. 이 같은 부수는 당시로서도 매우 많은 발행부수였다. 그것은 농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 협동조합운동과 예수촌 건설 운동
유재기의 농촌운동 재건의 정신은 일제하 운동이념의 연장에서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수렴되는 기독주의 이념이었다. 그 목표는 농촌자립을 통한 농촌복음화였다. 따라서 농촌운동 재건론은 일제하의 운동경험과 방안을 토대로 구상한 이상촌 관념에 입각한 예수촌 건설운동이었다.
해방 후 농촌운동 재건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당면과제는 예수촌 건설과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할 기독교 농촌지도자를 양성하는 문제로 설정되었다. 곧 조선농민복음학교(이하 농민복음학교) 설립안이었다. 그들은 농민을 교화 대상으로 파악하고 농민자립을 농촌복음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하였다. 기독교 농촌운동의 성패를 기독주의 지도자 양성에 두었던 일제하 이래의 복음주의 농촌운동관은 이 시기에는 관찰되었다. 이를 위해 유재기는 농민복음학교를 설치하여 농촌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농민복음학교는 덴마크 국민고등학교(민중고등학교)를 모델로 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일본에서도 賀川․杉山을 중심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1930년대 농촌지도자를 양성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나 정치적·경제적 어려움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유재기가 추진할 농민복음학교운동은 농촌건설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농민복음학교의 목표를 경제적 혼란과 농촌 피폐로부터 농촌을 개혁하고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는데 있었다. 농민복음학교의 근본적인 운동은 정신 및 농사개량실천에 두었다. 유재기는 이 운동이 성공되면 농촌은 구원을 받게 된다고 礎信하였다.
따라서 유재기는 기독교 농촌운동의 가장 시급한 과제를 농촌지도자 양성으로 보았다. 이를 위해 유재기는 1947년 1월 제1회 조선농민복음학교를 설립․개최하였다. 농민복음학교 개강 요지에서 “朝鮮이 사는 길은 朝鮮農村이 사는 길에 있다. 농촌을 살리는 길은 그리스도의 十字架에 있을 뿐이다. 十字架를 지고 농촌을 開拓할 젊은이들은 이 학교로 오라 우리의 불같은 리론과 하나님의 뜨거운 능력으로 연마하여 우리는 각기 한 촌락으로 드려가자.”라고 하여 청년지도자 양성을 통해 조국재건을 이루고자 하였다.
당시 유재기는 농민복음학교를 통해 한국의 농촌문제를 농촌청년들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따라서 농촌청년들을 ‘예수촌 십자군으로 양성’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당시 유재기를 덴마크 전후 농촌을 재건한 끄른드비히와 같은 목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농민복음학교는 덴마크 국민고등학교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농민복음학교 수료자는 대구․경북지역 출신이 경기도 다음으로 가장 많았다. 이것은 유재기가 해방이전 이 지역에서 농촌운동을 전개한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제1회 농민복음학교 이후부터는 지역별로 개강을 하였다. 농민복음학교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개강하였다. 특히 제6회 농민복음학교가 강원도 원주에서 열렸다. 강원도는 당시 기독교 불모지였다. 한편 농민복음학교에 비기독청년들도 참석하였으며 지역 군수가 농민복음학교 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경상남도에서는 흥국형제단 주최로 학무국 사회과와 경남노회 사회사업부의 후원으로 三百村을 목표로 진주․마산․부산지역을 나누어서 제8회, 제9회, 제10회 농민복음학교가 열렸다.
특히 제12회 농민복음학교(1949년 2월 15일)의 경우, 유재기가 직접 황해도에 가서 강연을 했다. 유재기는 연백금융조합과 국제신문사 연백지사가 주최한 농민복음학교 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國民經濟再建과 協同組合”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그는 휴전선 주변 황해도에서 농민복음학교를 개강한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유재기는 1949년 3월 19일 경남 밀양에서 김학응 목사와 정성용 장로의 요청으로 제14회 농민복음학교를 열었다. 面의 후원을 받아 초등학교 강당에서 面民과 무안중학교 학생들 수천명이 애국적이고, 복음적인 강연을 들었다. 面長의 천거로 청강생도 많았다. 1949년 8월, 경남 거제도에서 열린 제14회 조선농민복음학교는 경남 3개노회 연합과 흥국형제단 제3회 수양회을 연합하여 개최하였다. 세부적인 자료는 없지만 경기도 지방의 경우 남궁혁 박사가 주도하여 3곳에 농민복음학교를 개강하였다.
농민복음학교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수료생에게는 수료식을 통해 다시 한 번 十字兵으로 자신의 향촌에서 밀알이 되어 농촌을 재건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이와 같이 유재기는 농민복음학교를 통해 신앙과 영농 기술을 겸비한 농촌 지도자를 길러내어 궁극적으로 그 마을을 복음화 하는 것을 예수촌 운동의 최종단계로 보았다. 이렇게 배출된 농민복음학교 수료생들을 農福學友會라는 조직원으로 삼아 관계를 맺었다.
농민복음학교을 졸업한 학생들은 현지에서 어떠한 활동을 벌였으며, 얼마 만큼의 성과를 거두었을까. 이들은 졸업 뒤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協同組合運動․婦人運動․農村少年運動․技術運動․공동경작․문맹퇴치․사회봉사등을 하면서 직·간접으로 한국농촌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졸업생들은 그들이 배운 새로운 농법인 공동경작을 통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47년 1월에 제1회 농민복음학교가 시작한 이래 1949년 8월 14회에 걸쳐 이루어진 조선농민복음학교 학생들은 모두 총 448명이었으며 수천명의 청강생이 참석하는 큰 성과를 보였다. 이들 수료생들은 예수촌 십자군으로 양성되었다. 농민복음학교는 자기 지역 출신의 농촌지도자를 배출하였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전국적인 예수촌 건설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이상에서 해방후 유재기의 농촌운동은 농민복음학교 같은 학교를 통한 농촌지도자 양성이 중심이었다. 지역적으로도 전국을 대상으로 하였다. 농촌 운동도 기독교 흥국형제단이라는 초교파적 전국적인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하였다. 또『興國時報』를 통한 활발한 언론 활동을 병행하여 기독교 농촌운동을 진행한 것이 특징이었다. 기독교 흥국형제단 총재인 함태영이 하와이 교포들에게 재정 협조를 구하는 편지에서 ‘이남에 이 운동을 시작하여 성과를 거두는 마을이 약 350 동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유재기가 「우리는 조국을 기독교의 정신으로 無窮하도록 하게 함」이라는 슬로건으로 기독자의 애국운동, 평화, 자유와 행복한 민족겨레를 建國한다는 사명의 결과였다.
유재기는 1949년 7월에 예정된 경남 3노회가 연합으로 개최할 제14회 거제도 농민복음학교 개강을 앞두고 농민복음학교와 『興國時報』를 걱정하며 1949년 7월 13일 저녁 44세의 짧은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Ⅵ. 결론
본고에서는 일제시기 및 해방 공간에서 예수촌사상과 농촌운동을 펼친 유재기를 연구하였다. 그렇다면 유재기를 한국현대운동사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우선, 그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실천 활동을 전개하여 역동적인 삶의 궤적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의 현실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해결 방안에 대한 확신은 중단 없이 일관된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그에 대한 평가를 일제 시기와 해방 이후로 구분하여 보면, 먼저 일제시기의 경우 가장 큰 특질은 계급문제·민족문제를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해결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해결 방안으로 농우회 조직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예수촌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제침략이 강화되는 가운데서도 청년면려회 조직을 중심으로 예수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 파시즘체제하에 친일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의 예수촌운동은 식민지 조선의 주객관적인 조건 속에서 1920·1930년대의 현실주의에 입각한 자신의 전망과 활동으로 귀결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예수촌운동은 식민지시대 조선 민족의 현실적 당면이익 차원에서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다음으로 해방 이후 가장 큰 특질은 무엇보다도 1945년에서 1949년까지 농촌재건과 신국가 건설을 위해 흥국형제단을 중심으로 전개한 예수촌운동이다. 그는 일제하 예수촌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형성하여 체계적인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해방 이후 사회문제를 정치적인 해결 방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촌을 건설하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유재기의 예수촌운동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일제시기 그의 예수촌운동에는 일제의 파쇼화 정책과 기독교계 보수주의 세력에 대한 대응책이 미약하게 처리되는 한계가 있었다. 둘째, 해방공간에서 그의 예수촌운동은 초교파적인 조직과 진보적인 인사들의 참여로 기독교계의 지지를 받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유재기의 예수촌운동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종교계를 비추어 볼 때, 종교계가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사회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에 대한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특히 한국현대운동사에 있어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한 특유의 보수성에 대한 비판적 준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본 논문은 한국근현대 사회운동사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 첫째, 한국근현대 각 시기에 한국사회의 현실문제에 기독교계의 참여와 활동을 제시하고, 실천활동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유재기를 통해 현대한국사회에 대한 기독교계 사회참여를 이해하는 데 일정한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유재기의 이념적 지향과 실천 활동의 밑바탕에는 기독교 정신이 깔려 있었고, 그런 사상적인 매개로 그는 한국근현대사의 변동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어 나갔음을 밝혔다. 섯째, 해방 이후 예수촌운동의 배경과 내용 그리고 전개과정을 통해 기독교계의 농촌재건과 신국가 건설운동의 계기와 지향성을 해명하였으며 이로써, 유재기 자신이 구현하고자 한 농촌운동의 지향과 변동을 밝혀 한국근현대운동사의 한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아가 그를 통해 기독교계의 한국사회의 현실참여에 대한 역할과 역사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한편 본 연구가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한국사회의 구조와 변동을 가능케 하는 국내외적 조건들의 관계 속에서 살피는데 미흡하였다. 둘째, 유재기의 예수촌운동과 다른 이상촌과 비교 분석에 대한 고려가 미흡하였다. 셋째, 유재기의 활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간의 상호비교 혹은 유기적 연관에 대한 분석이 미흡하였다. 이들 한계는 한 시대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미흡한 필자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향후 연구과제로서 충실히 보완할 계획이다.
앞으로 유재기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키고 나아가 기독교 농촌운동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구 대상 시기의 외연을 확장시켜 긴 안목에서 조망할 수 있는 연구방법론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근현대사 연구에서 기독교계 사회운동의 확장을 통해 현대한국사회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의 나아갈 방향을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김병희 목사님 약력
총신 신대원 85회
대구 서변제일교회 담임목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한국사 전공 교육학 석사
계명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 한국사 전공 문학 박사
계명대학교 외래교수
대신대학교 출강
경운대학교 출강
총회 역사위원회 위원
총회역사위원회 사료분과 서기
대구 경북 교회사연구회 전문위원
한국 기독교 인물연구소 소장
저서: 경북 교회사 외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