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가운데 드린 쌀연보, ‘성미’(誠米)
김병희 목사(서변제일교회, 한국기독교인물연구소 소장)
옛날 우리 조상들은 가을걷이가 끝난 후 감나무에 감을 몇 개씩 남겨두곤 했다. 새들의 먹이 특히 까치를 위한 것이었다. 한 마리 새 조차도 소중히 여기는 후덕한 마음이 담긴 미풍양속이다. 그 마음에는 한낱 날짐승까지 마음을 다하면 그 덕이 자식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한 부모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 그때의 따뜻한 정(情)은 한국교회에서 아름다운 전통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온 ‘성미’(誠米) 속에도 배어있다.
오래전에 없어진 교회도 있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마다 ‘성미함’이 있다. 주일 예배에 나오면서 각자 신발주머니 같은 성미주머니에 쌀을 가득 채워오는 것은 한국교회의 오랜 전통이었다. 특이하게도 여전히 현물로 드리도록 되어 있는 것이 ‘성미’이다. 성미를 뜨는 이런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한국 교회의 성미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토착적 전통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성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05년 남감리교 선교사로 개성에서 사역하고 있던 크램(W. G. Cram) 선교사의 보고에 나온다.
“우리 구역 조사들과 권서(성경책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사업 보고를 하는 가운데 한 권서가 보고하기를 어떤 부인들이 남녀전도인 생활비로 3달러 50센트를 헌금했다고 하였습니다. 여인들의 힘으로 그만한 돈을 모았다는 것이 예외적인 일이기에 그 연유를 물었더니, 교인들은 예수님 믿기 전에 귀신을 섬기는데도 아주 열심입니다. 이 여인들은 밥을 지을 때마다 식구 수대로 항아리에 한 숟갈씩 퍼서 모아두었다가 어느 정도 모이면 이것을 귀신을 섬기는 무당에게 갖다 바쳤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생각해보니 적어도 우상을 섬기는 정도의 열심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밥을 지을 때마다 식구 수대로 한 숟갈씩 퍼서 모아 구역 내 남녀전도인 생활비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 진행된 미신타파정책으로 지금은 사라졌지만 복음이 들어오기 전, 우리 선조들은 자신의 집안에 신(家神)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집안에 거처하는 여러 신 가운데 으뜸인 ‘성주신’(城主神)이 집안 전체의 운과 복을 관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밥을 지을 때마다 식구들의 건강과 복을 빌며 쌀을 한 줌씩 따로 떼어 집안을 지키는 성주 귀신에게 바쳤다. 그렇게 정성으로 쌀을 모아두었다가 고사를 지낼 때 떡쌀로 썼다. 그런 쌀을 보관하는 항아리를 ‘성주독’, ‘성주단지’, ‘성주항아리’라 하여 집의 한 귀퉁이에 모시는 신앙의 상징으로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서 귀신 섬기는 일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집안 식구들을 위한 기도를 중단할 수는 없었던 여인들은 항아리에 십자가를 그린 후 식물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넉넉하진 않은 형편에도 쌀을 떼었다. 밥을 지을 때마다 “이는 예수님의 몫입니다”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식을 위해,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주님께 빌었다. 귀신 섬기던 신주단지는 ‘주님의 단지’(The Lord’s Pot)로 바뀌었고 귀신에게 바치던 쌀은 남녀전도인의 ‘하늘양식’이 되었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를 믿고 그들의 삶의 방식 모두를 바꾸었다.
당시 농경사회에서 그것도 경제력이 없는 부인들은 헌금을 할 수 없어 가족을 위해 밥을 지을 때마다 쌀이나 보리를 퍼서 모아두었다가 현물을 드리는 성미연보를 드렸다. 개성에서 시작된 성미 제도는 선교사를 통해 다른 지역에도 소개되었다.
성미에 대한 몇 가지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구·경북지역에서는 1919년 경북노회 서북지방시찰위원 연보형편 보고서에서 ‘부인들이 성미연보 하였다’고 보고했다. 다음해(1920년) 경북노회 동남시찰 보고에서 ‘남녀전도인의 봉급은 별연보와 성미로 담당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광주지역에서는 1922년 서서평 선교사에 의해 조직된 부인조력회에서 성미를 실시하였다. 서울에서는 1929년 새문안교회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7개년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부인전도회가 성미운동을 전개하였다. 부산·경남지역에서는 1937년 경남노회가 성미를 특별히 장려하여 부인전도회를 조직하였다. 이같이 부인전도회를 중심으로 성미는 운영되고 확산되었다.
한국 최초 부인전도회는 1898년 널다리골교회에서 조직되었다. 대구·경북지역에서는 1912년 대구제일교회에서 가장 먼저 조직되었는데 특히 1924년부터 1925년까지 부인전도회가 대구·경북지역에서만 79개 교회에서 조직되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는 교회마다 부인전도회가 가장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이때 성미운동은 전국교회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교회가 1919년 3·1만세운동을 주동한 연유로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물리적인 피해와 정신적인 피해가 심각했던 때였다. 여기에다 잦은 흉년으로 가난한 남녀전도인들은 한 식구가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도 힘겨웠다. 이때 부인들의 성미로 남녀전도인의 생활비를 책임졌다. 이것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자립 교회’(self support) 전통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교회 내에 식미로 사용하며 가난한 교역자, 신학생,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는 데에 충분했었다. 또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더러 사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현물을 드린 고유한 전통문화인 성미는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식생활문화의 변화와 성미에 대한 인식부재로 한국교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현대 교회에서 성미문화가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계화된 기독교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 교회마다 성미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하겠다. 무엇보다 성미의 가치는 ‘성미를 준비하는 정신’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매일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자식의 안녕을 위해,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가난한 이웃의 안타까운 현실을 나눔의 실천으로 채워나가는 아름다운 전통은 곧 기독교 정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