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 목회
김일호 목사
동명교회
서울한동노회장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일정한 직업에 전념하거나 한 가지 기술을 전공하여 그 일에 정통한 사람을 '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장이'는 순수한 우리말로 전문가를 뜻하는데, 사람이 전력을 다하여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철저한 장인 정신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40년 전만 해도 우리 주변에는 예수쟁이’라고 놀림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욕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욕처럼 들리는 예수쟁이들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저 사람 예수쟁이야”라고 말하는 소리들을 잘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아서 일까요? 아니면 예수쟁이의 맛을 잃어버린 걸까요?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위해 양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다니시는 예수님은 진정 오늘의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할 ‘목회장이’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왕 삼으려는 사람들, 병 고침의 기적을 체험하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의 대형 목회 현장을 뿌리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또 다른 곳으로 복음을 전하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담담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나 현실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은 이러한 예수님의 목회 방식과는 정 반대의 길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마리의 양쯤이야’ 하는 무시의 태도와 크게 보이는 아흔아홉 마리에게 온갖 애정과 정열을 쏟아 붙는 “가성비(가격대비 성능) 목회 철학”을 가지고 대기업적 대량생산에 적합한 메시지와 프로그램으로 철저하게 무장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목회의 감동과 고난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한 마리 잃어버린 어린양의 story는 옛 추억 속의 빛바랜 사진이 되어버렸고, 좋은 입지의 큰 예배당, 그리고 스펙 좋은 교인들이 넘쳐나는 한마디로 성공하는 목회에 모든 가치가 매몰되고 있습니다.
목회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 목동들에게 가르치시고 생명을 다해 지키라고 가르치신 목회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을 알고 그 한생명의 구원 story를 만들라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목회가 있는 곳에 거지 나사로의 삶이 핍박받는 그러나 승리한 또 하나의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되살아나게 됩니다. 나면서 맹인이 되어 맹인 된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죄인처럼 산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삶이 자신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치료의 은총을 받아 밝은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까지, 그 숱한 눈물의 시간을 위로하며, 함께하는 목회, 그것이 목자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정의(正義)의 문제에 대해 탁월한 업적을 남긴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롤스는 모든 정보가 차단된 가설적인 ‘무지의 장막’에 싸인 원초적 상황에서 정의의 원칙을 수립했습니다. 그가 도출한 원칙은 ‘최대최소의 원리’에 기초한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회에서 제도를 수립할 때 사회의 최소 수혜자의 후생수준이 그 제도에 의해서 이전보다 향상될 수 없다면 그 제도는 ‘부정의(不正義)’한 것으로 봅니다. 즉 이 원칙은 최소 수혜자들의 후생을 최대한 고려한다는 원칙입니다.
이처럼 사회적 후생의 정의도 이러한데, 목회의 정의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있는 자의 종교적 만족을 극대화 시키는 온갖 유아용 프로그램이 난무한 교회입니까? 아니면 고아와 과부를 충분히 배려하는 십자가를 담대히 지는 사도적 교회입니까?
베트남의 호치민 수상의 어록에 “잘 가르쳐야 잘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교인을 잘 가르쳐야 잘 배운 교인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교회는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그대로의 모습이 아닙니까?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2-4)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기형적인 현상들의 홍수로 마치 거센 물결에 떠내려가고 있는 듯한 교회를 봅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인들을 선교사로 교회 밖으로 내 보냄으로써 혹은 여러 가지 적임과 과제를 부여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근본적인 문제는 삶과 인격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제 목회자들은 더 이상 교인들에게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을 요구하기를 멈추고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을 요구하며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 인생의 마지막 영화인 이집트 피라미드를 거부하고 오직 본향을 바라보며 가 매장 상태로 머물기를 소원한 요셉이 나오며, 80이 넘은 나이에 세상의 안락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창문을 열고 기도하며 담대히 사자굴에 들어가는 다니엘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또 다른 종교개혁을 외칩니다. 종교개혁을 불러온 중세암흑기가 왜 왔습니까? 교회에 들어온 세상 권력과 부에 아부하는 목회자들이 가진 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종교적 만족을 주기 위해 마리아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의 처소를 만신 전으로 만들며, 말씀을 변질 시킨 결과가 아닙니까? 그러한 환경 속에서 목회자들이 수많은 돈을 치부하고, 총을 들며, 칼을 들고, 축첩하며, 온갖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는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암흑의 시대가 도래 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진리의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치는 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탐욕거리에 진리의 말씀으로 자유롭게 된 자 만이, 제2의 종교 개혁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제 2의 칼뱅과 루터가 나오는 것입니다.
장이 목회는 목회 장이가 된 목사가 장이 교인, 장이 교회를 이루어 가는 예수님의 목회 방법입니다. 세상의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마음이 상하지 않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목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천성을 향해 찬송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아버지께 드리는 목사의 길입니다.